<레드브레스트>의 날갯짓은 딜레마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의 다른 이름은 슬픔이었다. 또는, 사랑이었다. 나는 달라보이지만 너무나도 닮은 그들의 힘겨운 날갯짓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러니까 계산된 위험인 셈이죠. 잘 되면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 거고, 아니면 완전 엿 먹는 거고요. 위험을 감수하느냐 마느냐. 괜히 도박을 했다가, 어느 날 밤 꽁꽁 얼어붙어 나뭇가지에서 떨어질 수도 있어요. 봄이 올 때까지 얼어 있는 거죠. 반면 겁이 나서 남쪽으로 갔다가 돌아와보면, 둥지 틀 곳이 없을 수도 있고요. 사실 이건 우리가 늘 대면하는 영원한 딜레마예요._p.18~19

 

 

 

 

  중립을 선언한 스웨덴은 노르웨이를 향하는 독일군에게 길목을 열어줬고, 노르웨이는 독일군에 점령당했다. 국방장관이었던 크비슬링은 독일군에 가담했고 노르웨이 왕실은 끝까지 저항하다 결국은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점령당한 조국을 바라보고 있던 청년들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독일군에 가담하여 공산주의 소련군에 맞서 싸워 이겨낼 것인가, 나치에 끝까지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뛰어들 것인가. 노르웨이를 구하는 방법은 승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독일군에 자원입대하는 길이 옳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군은 1944년부터 급격하게 밀리는 형세를 보였고, 끝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2차 세계 대전은 동부전선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역사 속에 '매국노'로 낙인찍었다. 히틀러의 몰락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한 시민들의 수는 급격하게 늘어났고 그들은 영웅이 되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 역시 50년 전, 딜레마에 놓였지만 결국 한 가지 선택을 했다. '진홍가슴'이라 불렸던 그 남자는 50년의 세월동안 다시 살아왔다. 하지만, 진홍가슴새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또 한 번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복수. 배신자를 처단해야 한다.

 

 

 

 

 

세상에는 언제나 재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죠. 그게 세상사에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요. 매해 바위종다리의 60퍼센트가 죽는 거 알아요? 무려 60퍼센트나요! 우리가 일손을 놓고 그 통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다가는 결국 우리도 그 60퍼센트에 속하게 될 거라고요._p.118

 

 

 

 

  그렇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질 사람은 깨진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60퍼센트에 속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60퍼센트로 밀려날 위기에 처한 바위종다리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그게 세상사니까. 하지만, 그렇게 '이게 세상사니까'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60퍼센트의 범주에 그녀를 순순히 보낼 순 없다. 분하고 억울하다. '네메시스'의 보복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또 한 마리의 '레드브레스트'는 이제 막 날개 한 쪽을 잃었고, 이마에 박힌 가시를 뽑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날갯짓을 시작했다. 그래서, 여신의 행방을 찾는 일은 아직 그에게는 버거워보인다. 5월. 앞으로 두 달의 시간이 남았다.

 

 

 

 

…는 너무 기쁜 나머지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의 손을 한층 더 꽉 잡을 뿐이었다. 심장이 기쁨에 겨워 지저귀는 바람에 그녀는 조용히 하라고 타일러야 했다._p.194

 

 

 

 

  날개는 잠시 접어두고 싶었다. 비행 끝에 만난 사랑은 심장을 지저귀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세상은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 하고, 그래서 심장은 더더욱 힘차게 지저귀고, 그 두근거림을 억누르지 않고 자기 앞을 가로막는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은 제자리로.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어요.' 지독한 이기심으로, 가장 순수한 결정체를 짓밟혔다. 사랑.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었다, 욕망을 제외하고.

 

  역사는 느리더라도 결국은 좋은 방향을 향하게 되는 것일까? 시간이 흐르면 역사는 결국 옳은 쪽으로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역사 속에서 가장 비겁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그렇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다. 그것은 '딜레마'이기도 하다. 요 네스뵈의 <레드브레스트>는 역사의 거친 물결 속에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노르웨이의 청년들의 딜레마를, 그 선택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된 노르웨이의 사회를 담아내는 것도 잊지 않는다.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면서 그려내는 구성은 그렇기에 상당히 매력적이다. 노르웨이를 방문한 미국의 대통령, 노르웨이에 살고 있는 중동인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신나치주의자, 새삼스럽게 세상의 아름다움을 깨달은 노인, 1945년 전쟁터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조건부 영웅이자 '리베로'가 된 한 남자, 프린스, 날개 한 쪽을 잃은 박새 헬게, 또 다른 사랑. 과거와 현재라는 씨실과 날실이 얽혀들어 비로소 완성되는 그림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진홍가슴새 한 마리였다.

  요 네스뵈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나치 편에서 함께 싸웠다는 이야기에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에게 자신이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려주었고, 비로소 그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 테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치열하게 담아낸 <레드브레스트>는 감히 여기에 짧은 말로 담아내기에는 부족한 큰 울림을 전해준다. 직접, 레닌그라드를 코앞에 둔 채 죽어갔던 군인들의 이야기와 그로부터 50년 후의 노르웨이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밖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게 없겠지만, 역사가 품고 있는 아픔을 정면으로 녹여내 소설로 담아냈다는 것은 <레드브레스트>가 요 네스뵈에게 조금 더 따끔한 아픔을 얼얼하게 품고 있는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동시에 시리즈 그 자체인 '해리 홀레'의 정체성과 그의 운명이 확고하게 자리잡는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레드브레스트>는 주로 해리 홀레를 괴롭히는 상대를 상징하는 다른 시리즈(그래봤자 아직은 <스노우맨>, <레오파드> 밖에 못 만났지만)의 이름의 주인이자 동시에 해리 홀레 그 자체로 느껴지기도 했다. 앞으로 마주칠 해리 홀레의 수많은 딜레마와 시련, 그리고 그 앞에 놓여있는 '선택'을 암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레드브레스트> 속 해리는 동료를 잃는 커다란 슬픔을 마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노우맨>과 <레오파드>에서 보여지는 암울함과 안티 히어로적인 면모에 비하면 너무나도 밝고 상큼하기까지하다. 여기서부터 서서히 망가져가는 해리를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아프고 애잔한 여정이 될테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도 이런 시절도 있었구나 싶은 다행스럽다는 모순적인 감정이 느껴지는 것 또한 이 <레드브레스트>가 품고 있는 딜레마일지도 모르겠다. 비로소 십자가에 못박힌 남자의 이마에서 가시를 빼내던 레드브레스트는, 그렇게 붉은 가슴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다음 선택은, 보복의 여신 <네메시스>다.

"네. 하지만 선배는 저 새가 붉은날개지빠귀와 다를 게 뭐냐고 생각하겠죠?"

"맞아." 해리는 손으로 눈가에 그늘을 만들었다. 근시가 됐나?_p.17

 

 

"그럼 내가 할아버지 심판자겠네요." 소년이 말했다.

"뭐라고?"

"알리는 신이거든요. 그리고 신은 다니엘의 심판자라면서요. 내 이름은 알리고, 할아버지의 이름은─."_p.49

 

 

그들은 서로 마주 보았다. 깃털처럼 가벼운 작은 눈송이가 두 사람 사이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신드레가 빙긋 웃었다. "달빛과 눈을 동시에 보다니. 이거 정말 보기 드문 광경 아니야?"_p.91

 

 

"아무래도 청력 검사를 해봐야 할 거 같은데요? (…) 성함을 세 번이나 불렀거든요."

난 내 이름을 잊었다오. 내가 썼던 그 모든 이름을 다 잊었지._p.164

 

 

두 사람이 함께 보낸 빈의 마지막 밤은 꿈처럼 아스라한 베일에 싸여 있었지만, 그래도 추운 날이면 그녀는 어김없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음을 녹였다. 그 여름밤의 찰나까지도 곱씹었으며, 언젠가는 그 기억이 웃음을 그다음에는 눈물을 짓게 할 것이다. 그 이유도 모른 채._p.261

 

 

전우들은 고국에서 주입받은 거짓말을 위해 목숨을 바친 거요. 또한 내 삶을 망가뜨린 것에 대해서도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었소. 내 삶은 절대로 다시 온전해지지 못할 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이 나라를 정말로 배신한 모든 이들에게 보복하는 것이었소._p.308

 

 

1944년의 봄과 여름, 나는 들것에 누워서 기관총의 발포 소리를 들으며 죽음을 생각했소.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소._p.342

 

 

"어느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도덕적이고 비도덕적인지 누가 정할 수 있겠나? 심리학자? 법정? 정치가?"

"맞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걸 정하는 사람들이 있죠."_p.533

 

 

전쟁은 늘 그런 법이다. 그러니 날 선택권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군인으로서 심판해주길 바란다. 그것이 내 소망이다. 하지만 날 혹독하게 비난해야만 한다면, 당신 역시 실수할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당신이나 나나 늘 그럴 것이다. 결국 심판자는 한 사람뿐이다. 하느님. 이것은 내 자서전이다._p.617

 

 

발코니 앞에는 초점이 맞지 않는 떡갈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죽은 나무는 검은 마녀의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나뭇가지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딱 총알이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노인은 초조하게 자세를 바꾸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없던 새였다. 곧 다시 날아가겠지. 노인은 총을 내려놓고, 욱신거리는 폐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_p.6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