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친구를 따라 모험을 감행한 적이 있다. 아마 내가 6살쯤의 일이었으니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이었던 셈인데, 무려 동네를 둘러싸고 있는 큰 길 건너 저편으로 갔던 일이다. 친구의 오빠 집에 놀러간답시고 걔만 믿고 야심차게 쫄래쫄래 따라갔는데 무정한 친구는 나는 오늘 여기 있을테니 너 혼자 가… 라는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닌가! 어느 정도 산을 끼고 있는 아파트인지라 난생 처음 그렇게 부모님 없이 발을 들인 동네에서 어떻게 빠져나갸아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게다가 그 때 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었던지라 자전거까지 끌고 간 상황에서, 혼자 돌아가려니 갑자기 서러움과 무서움이 솟구쳤던 것 같다. 겁쟁이었던 나는 결국 울음이 터졌다. 엉엉 울면서 돌아온 나를 본 어머니께서는 무슨 일이냐고 나를 다독이셨지만, 차마 큰 길을 건너 다른 동네에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또 알고 있었는지 어머니에게 혼날까봐 상당히 쫄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또 몸집도 커지면 점차 나의 행동반경도 넓어진다. 그렇게 어릴 때는 건너면 안 될 것 같았던 큰 길은 버스를 타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코스가 되었다. 어릴 때는 무지하게 커 보였던 학교 운동장이 굉장히 작다. 엄마 손을 잡고 한참을 걸어야 겨우 유치원에 도착했던 것 같은데 그 곳은 걸어서 3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어린 시절에 함께 흙장난을 하며 놀던 친구들, 혹은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조금만 걸어가면 만날 수 있던 친구들도 하나 둘 이사를 가고 나니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더 줄어든다. 이날 이때쯤 시간 있냐고 물어보는 친구를 보면서 얼마 전만 하면 그냥 즉흥적으로 전화로 불러내어 만날 수 있었던 때가, 동네에 있는 치킨집에서 함께 닭다리를 뜯어먹을 수 있는 일도 이제는 별로 없다.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건만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함께 자란 내 키가 어느새 살짝 위에 올라가 뛰어내릴 수 있는 담벼락(이라 하기도 민망하지만)을 한참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세상은 왜 함께 커지지 않고 오히려 줄어들어가고 있을까, 등의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문득 쓸쓸해진다.         구보데라 다케히코의 <모두, 안녕히>는 그 쓸쓸함을, 자신의 우주를 지키고 싶은 한 청년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도 필요한 것은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으니 단지 바깥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는 와타라이 사토루. 은둔형 외톨이라 하기에는 조금 그렇다. 집 밖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며 사람들과의 교류를 일체 하지 않으며 완벽하게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덕분에 머리도 자르지 못해 길게 늘어뜨리고 음침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런 인물을 상상했다면 잠깐 그 궤도를 수정해 주시라. 평범하게 옆집에 살고 있는 소녀와 대화도 나눌 수 있고, 단지 내라는 조건만 붙어있을 뿐 친구들과 평범하게 그럭저럭 놀 수도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친구들이 모두 단지 밖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닐 때 사토루는 복지관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자신의 멘토 격인 오야마 마스다쓰(최배달)을 본받아 신체를 단련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식 당시 107명이었던 사토루의 동기들이지만, 단지 속에 살고 있던 그 107명은 한 명 두 명씩 단지를 떠나며 오래된 아파트에 거주하는 거주자들 역시 점점 줄어들어가기만 한다. 단지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토루는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며 묵묵히 지내고 있건만, 사람들은 그를 남겨둔 채 떠나간다. 오래된 아파트에는 어느새 노인들만 남아 있다. 그렇게 모두가 세상 밖으로 떠나가면서 남게되는 사토루의 고독이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사토루는 왜 자신의 우주를 그렇게 한정지어 살아가고 있는 걸까? 그는 그 우주를 조금 넓힐 수는 없는 걸까?         책에 대한 사전 정보를 되도록이면 얻지 않고 최대한 책 표지에 담겨 있는 정도만 습득한 채 소설을 읽어가곤 한다. 가끔은 책 뒷표지에 담겨 있는 문구도 내버려둔 채 작가 소개서부터 차근차근 이야기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편인데, <모두, 안녕히>는 그런 나의 선택이 굉장히 잘못된 케이스라 할 수 있을 것 같다(하긴, 그런들 또 어쩌겠는가!). 조금 독특한 주인공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그의 이야기를 들어버린 덕분에 나는 편견에 사로잡혀 삐딱한 시선으로 책을 읽어내려갔다. 도대체 사토루는 뭐 하는 녀석인가? 단지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체 단련을 할 수 있지만 도대체 순찰대를 만들어 친구들이 집에 다 들어왔는지 확인하는 오지랖은 무엇인가? 좋게 말해 오지랖이지, 누군가가 나의 집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기분이 나쁜 일이다. 그걸 알면서도 순찰을 돌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 없다니, 해도해도 너무하잖아!   덕분에 나는 사토루라는 주인공에게 너무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뭐야 얘, 이상해, 무서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은둔형 외톨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일본스럽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파트 단지라는 결국은 폐쇄적인 공간 속에 자신을 가두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이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어마어마하게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배경이 다른 곳이었다면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소설의 장치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사토루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이 등장한다. 그제서야 나는 아, 하고 공감과 이해(하지만 이해라니, 정말 이해하긴 한 걸까? 이해라는 것은 참으로 오만한 말이다.)의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사토루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편견에 사로잡혀 이상한 아이로 지켜보고 있었던 나의 시선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실로 사토루의 삶은 단지 내의 사람들로부터 훗날 그를 취재하러 찾아온 방송국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편견의 시선으로 사로잡힌 채 흘러갔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사토루의 사연이 등장했더라면 온전히 공감하며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지만, 만약 내가 느낀 그 부끄러움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그 의도는 내게 완벽하게 들어맞은 셈이다. 내가 모를 뿐이지 세상에는 그런 일이 숱하게 많으리라.(p.324) 다만 나에게도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세계를 닫아버린 한 청년을 바라보는 세상과 같은 시선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공감하고 이해의 시선을 보내는 그 마음이야말로 내가 바라본 사토루였고 그것은 바로 세상이 사토루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편견에 사로잡혀 정서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읽어내려갔던 순간을 다시 되돌려 책을 펼쳐봐야겠다. 다시 되돌려서 읽으면 오로지 사토루의 고독과 소노다의 두려움과 그들을 바라보는 단지 주민들의 모습을 다시 바라볼 기회가 생긴다. 이것이 소설이라 참 다행이다.   고독하지만 자신의 주변을 딱딱하고 견고한 껍질로 둘러싸고 있는 사토루가 자신의 껍질을 깨뜨리는 순간의 감정이 두 번째에는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하다. 사토루를 바라보고 있던 나의 시선을 당혹감과 부끄러움으로 문득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 너는 그렇구나, 너 아팠구나' 하는 무덤덤한 생각으로 넘어가버린, 오랜만에 만난 일본 소설 특유의 감성이 다시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하다.   소설 속 분위기를 느끼는 감성은 다를지언정, 자신만의 넓었던 세계가 줄어드는 것을 바라보는 쓸쓸함과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는, 누구나 마음 속 어딘가에 조용히 품고 살아가고 있을테니까.   책을 막 덮었을 때의 덤덤함과는 달리 이렇게 소설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을 사토루를 다시 마음으로 곱씹고 있노라니 슬그머니 마음이 아파오는 것은, 사토루의 청춘의 상처들 역시 그렇게 향수 속으로 안녕을 고했을 테니까…. 단지, 정말 좁잖아. 집만 좁은 게 아니라 세상이 통째로 좁다고 할까……. 저기, 이런 거 주제넘은 참견이지만, 싫증 안 나? 줄곧 틀어박혀 있으면._p.71 벌써 몇 십 명이나 줄었잖아. 앞으로도 꾸준히 줄 게 분명해. 졸업하고는 다들 여기저기서 새 친구를 사귀고 있어. 단지에 틀어박혀 있으면 사토루의 친구는 계속 줄어들 거야. 쓸쓸하지 않아?_p.73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화면을 정지시켰다. 화면 속의 나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절대로 되기 싫었던, 나약하고 불쌍한 바로 그런 인간이었다. 그러면 나는 대체 어떻게 보이기를 원했던 걸까. 흥분해서 '단지의 기사'라는 말을 내뱉은 걸 보면, 어느새 내 안에 유치한 영웅주의적 자화상이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_p.185 그렇지만 오야다 마스다쓰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업적은 과대 포장되었을지 몰라도 여러 전설의 핵심이 된 사실은 분명 존재했을 것이고, 오야마 마스다쓰가 나와 다름없이 싸움에 공포를 느끼는 인간이기에 더욱 그런 달성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씁쓸한 깨달음으로, 내게는 유년기의 종말이라 할 만한 일이었다. 스물일곱 살에 유년기라니 웃을지도 모르지만 정신적 성장에는 개인차가 있는 법이다._p.292 그날 할아버지의 대머리에 침 폭탄을 명중시킨 것은 나와 마쓰시마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므로 우리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모를 뿐이지 세상에는 그런 일이 숱하게 많으리라._p.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