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화원, 미인도

소설을 통해, 드라마를 통해, 영화를 통해 단원 김홍도와 신윤복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 뜨겁다.

김홍도가 일본의 전설적인 화가 샤라쿠(유럽의 화가들에 영향을 미쳤고, 그에 대한 기록이 적고 활동기간도 매우 짧아 신비에 싸인 인물)와 동일 인물(김홍도의 생애중 일정기간의 공백기에 일본으로가 모종의 임무를 수행)이란 설이 학계에 제기되었는데 이를 소재로 한 설이 색 샤라쿠다.

학계에서는 단원 김홍도가 색 샤라쿠인데 반해 이 소설은 단원 김홍도가 아니라 신윤복이란 차이가 있다.

작가가 후기에 허구라고 밝히고 있으나 본인이 인사동의 고서점에서 구입한 고서적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집필한 것이라고 하니 역사와 팩션 사이에서 의문점이 강하게 찍히게 만든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관계마저 사제지간이 맞다 아니다 설왕설래 하고 있고 심지어는 신윤복이 여자라는 설(바람의 화원)까지 나오고 보니 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세계 기록문화유산을 남긴 조상이지만 기록 자체가 왕 중심의 기록의 행간에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상상력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보니 팩션소설이 많이 출간되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도입부는 제 손으로 눈을 찌른 조선의 칠칠이자 조선의 고호라고 평가받는 좌은 최북이 닌자들에게 쫓기면서 탈출하는 간자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닌자에게 눈을 다친 최북의 이야기를 보면서 조선의 프로페셔널에서 접한 그 분의 이야기를 대비하니 놀랍기만 하다.

어진화사에서 단원을 만나고 정조 앞에서 김홍도와 그림으로 대결을 하다가 젊은 결기를 참지 못해 임금앞에서 감히 사고를 친 가원은 도망을 쳐 기생방에서 투전을 벌이고 급기야 행수기생과 자신의 시간을 건 내기에 져 연풍으로 납치를 당해 단원 김홍도로부터 간자훈련을 받는다.

애채(어젠가 바람의 화원에서 김홍도에게 애채(안경)를 사준 신윤복의 이야기에도 나온)를 쓴 소년 영재와 함께 정조의 갑자년 프로젝트의 비밀요원으로 일본으로 가기전 단원이 그에게 내린 이름이 바로 도슈샤이 샤라쿠다.

일본에서 우여곡절 끝에 가부키 출연 배우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사가 되어 비밀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어린 기생 사유리와의 사랑, 예술혼과 간자활동 사이에서의 번민, 갑자원 프로젝트 실행시 피해를 입게 될 일반 백성들의 고난에 대한 휴머니즘적인 고민들..현실의 고통을 잊고 싶은 사람들을 파고든 미륵교와 감로탱화를 그리면서 자신의 예술혼을 위해 악마와 손잡은 살인마의 연쇄살인, 동성애 등등이 다층적 구조로 얽히고 설키는 관계망이 펼쳐진다. 긴박감 넘치는 탈출, 사유리와의 하룻밤과 마지막 만남, 목숨걸고 그린 최후의 걸작 미인도, 소설의 종지부론 더없는 절창이다.

색 샤라쿠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 일본의 시대상황, 정치상황을 구도로 하는 조선인 간자의 이야기이면서 신비에 쌓인 샤라쿠와 감로탱화를 그린 살인마의 이야기를 대비시켜 진정한 예술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사유리와의 진정한 사랑을 모태로 목숨걸고 그린 미인도를 보고 단원이 조선의 최고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삶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고 혼연일체가 된 경지에 이르렀음을..

파편화되어 전해지는 이야기의 편린들을 모아 얼개를 짜고 살을 덧붙이기 위하여 작가가 참고로 한 책들과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 한권의 책으로 엮기까지의 여정이 지난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를 넘어 일본과 중국은 물론이요 멀리 서역과 유럽까지 무대가 확장된 팩션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보면 역사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데 한 몫을 하지만 역사와 소설을 혼동할 우려도 큰 만큼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역사적 사실을 단편적으로 덧붙여 주었으면 좋겠다.

색 샤라쿠와 유사한 소재의 팩션인 왕의 밀사를 읽었을때 처럼 긴장도 되지만 과거의 일을 소재로 한 것이라 어쨋든 이미 결론이 있는 이야기라 감동도 감동이지만 현실과 소설의 격차가 너무나 크기에 회한이 더 크게 남는다.

책에서 밑줄긋기

멀리 소쩍새가 울고 있다. 시어머니의 계략으로 굶어 죽은 가엾은 며느리가 환생했다는 새. 굳이 전설을 떠올리지 않아도 소쩍새의 울음은 슬플 정도로 청아한 데가 있다. 어쩌면 우리 백성은 소쩍새 전설에 나오는 그 며느리 신세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하고, 허리띠를 졸라도, 배를 채울 밥은 늘 모자란다. 솥의 크기를 속이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큰 솥은 뒤로 감추고, 작은 솥만 내밀며 이것이 최선이라고 순진한 마음들을 속인다. 하지만 백성은 소쩍새가 아니다. 힘없이 굶어 죽어 전설처럼 슬픈 노래나 부르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다.
솥이 적으면 그것을 녹여 곡식을 벨 낫을 만들리라. 적을 벨 검을 만들리라. 그리하여 큰 솥을 숨긴 자를 벌하리라. 주상은 그 백성의 마음까지 헤아리시고 큰 솥을 준비하시는 것이다. 만백성이 넉넉하게 밥을 나눌 수 있는 크고 튼튼한 솥을..., 그리고 나는 그 솥에 부어지는 쇳물이 되리라.  255~256쪽

"주군에게 맹세하고 들어온 무사들. 나에겐 부모가 없다. 하늘과 땅이 부모다. 나에겐 집이 없다. 깨어 있음이 집이니라. 나에겐 힘이 없다. 정직만이 나의 힘이다. 주군을 위해 죽는다면 기꺼이 한 목숨 내 놓고 죽으리."  259쪽, 무사들의 합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