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기생이 되었더라면 그녀의 아프고 무거운 생애가 조금은 가벼웠을까?

   차라리 혼인을 아니하고 평생을 홀로 살다 죽었다면 그 한이 덜했을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여인이 아니었더면 그런 시는 나오지 못했으리라.

 

   너무나 가혹하고 처절한 그녀의 인생을 관찰하는 나로서는

   그녀의 시를 읽는 나로서는

   다행이라는 잔인한 말을 전하고 싶다.

 

   여인이 아니었더면,

  

   그 새벽 이슬같고 한겨울 살얼음 같은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이 아니었더면

   그 깊이와 무게를 알 수 없는 한이 아니었더면

 

   명나라에서 열광하던

   오백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가슴마저 절절히 울리는

 

   그런 시는 나오지 않았을 거다.

 

    여인이라서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서

 

    허난설헌 이라는 이름은 이토록 강렬하고 시린 향기를 오래도록 오래도록 남기게 된 것 아닐까

 

 

 

 

맑은가을호수

옥처럼 새파란데

연꽃 무성한 곳에

꽃배를 매어두었어요.

님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따서 던지고는

행여나 누가 보았을까

한나절 혼자서 얼굴 붉혔어요

                      

    - 허난설헌의 시 , 채련곡

 

 

  윤지강 작가는 난설헌에 대한 이 소설을 쓰면서 참 많이 앓았다고 했다.

  역사 속의 인물을 글로 되살려오는 것은 작가가 그 인물이 되어 그의 인생을 다시 사는 거나 다름없으니

  윤지강 작가가 그렇게 앓았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간다.

  허난설헌이 어떤 생을 살다가 스러졌는지 모르던 바가 아니라서 어쩌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덥썩 이 책을 집어들었나보다

그러나 교과서에서 혹은 다른 책이나 자료들을 통해 전해들었던 것은

 그녀가 걸어야 했던 참담하고 처연한 인생의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난설헌, 나는 시인이다]는 허난설헌이 어떤 순간들을 지나 어떤 감정을 가지고 어떤 풍파들을 걸어갔는지를 세밀하게 다룬다.

그녀의 성장배경과 과정 그 속에서 그녀가 마주한 사람들과 그로부터 받은 영향들,

그녀가 어떻게 시를 쓰게 되었고 어떤 시를 썼는지

작가의 상세한 취재와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한 허난설헌의 서리같은 인생이 그려진다.

 

그녀의 인생이 워낙 험했던터라

문체와 글 전체의 분위기 역시 무겁고 엄숙하다.

역사 소설의 한계일 수도 있겠으나 글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내내 숨이 막힌다.

초희는 이 한 권 내내 숨돌릴 새 없이 운명의 풍파에 이리저리 날려갈 뿐이다.

이런 장중함이 조금만 덜했더라면, 무거운 호흡이 조금만 덜했더라면 더욱 좋았겠다싶은 아쉬움이 남는다.

 

 

 

p 33

이제 초희는 세상의 중심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고통을 극복할 유일한 길이었다.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고통을 피하지 않는 것, 풍랑을 만난 나룻배가 거대한 해일을 피하지 않고 파도 위에 올라타듯이 그녀는 세상의 중심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p39

초희는 곶감을 질겅질겅 씹었다. 곶감은 이제 단맛이 아니라 쓰디쓴 독약이었다. 초희는 그것을 천천히 오래도록 씹었다. 곶감이 아닌 과거를, 그리움을, 슬픔을 질겅질겅 씹어 억지로 삼켰다.

 

P220

밤하늘의 별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빛을 뿜듯이 인간은 고통을 겪을 때에야 삶의 정수를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p334

초희는 발걸음을 멈추고 옥류담에 비친 하늘을 내려다보았다. 물빛이 하늘의 빛을 다시 쓰고 있었다. 하늘은 물속에서 더욱 깊고 신비한 빛으로 태어나고 있었다.

시인은 바로 그런 존재라야 할 것이다. 새롭게 보는자.

 

 

한반도의 역사를 통틀어 여성에게 가장 가혹했던 시기라는 조선.

성리학과 가부장제도는 여자라는 성별에 너무나 많은 굴레를 씌우고 불합리한 역할을 강제했다.

어렸던 초희는 왜 저는 나라를 다스리를 여황이 될 수 없나요? 라고 물었고 이 물음은

그녀의 고통스러운 결혼생활과 가출을 거치며

왜 이 땅의 여인들은 사내들과 같이 자유롭지 못한가에 대한 의문과 탄식으로 번진다.

남부럽지 않은 집안의 자유스러운 가풍 속에서 성장해

 소문날 정도의 미모, 사대부들을 뛰어넘는 문인으로서의 능력을 갖춘 그녀로서는

자신의 날개를 제대로 펼칠 수 없게 하는, 아니 날개가 있다는 것조차 부인하는 당세를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한창 젋었던 그녀는 아이를 잃고 남편도 잃고 스승을 잃고 가족을 잃었다.

지식인으로서도, 여인으로서도, 아내로서도, 어머니로서도, 며느리로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렇게 하나씩 상실해가며 상실한 그만큼의 한을 채우고 마침내는 시를 깨우쳤다.

 

영화[시]에서 보았던 그것은 허난설헌의 삶에도 있었다.

인생이 아름다워 시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무너지고 아득해지는 캄캄한 현실 속에서라야 드디어 시가 시작되는 것

시란 그렇게 시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밤이 깊어야 별이 밝아지는 것처럼.

         

 

 

 

P358

시는 그 사람의 말 가운데 가장 진실한 것이다. 천지간에 정기를 모은 것이 사람이고, 그 사람의 몸을 맡아서 다스리는 것이 마음이며, 그 사람의 마음 밖으로 퍼져 나온 것이 말이고, 그 사람의 말 가운데 가장 진실한 것이 시라고.

 

 

경번(초희-허난설헌)아, 너는 절대 시를 포기하지 말거라, 지금 너는 조그만 나라 조선을 괴로워하고 네 박복함을 슬퍼하지만 언젠가 네 시는 봄날의 꽃비처럼 세상에 흩날릴 것이니라.

 

  

 

여인은 질투를 해서도 안되고 사회생활을 해서도 안되고 어느 자리에서든 눈에 띄어서도 안되는 그런 시대에

허난설헌은 다른 남자 얼마든지 있어, 다른 여자 만날거면 차라리 버릴거야 등등 여인 특유의 감성과

유,불,선을 가리지않는 거침없는 지성을 조합해 그녀만의 찬란한 시를 지었다.

 

송곳은 주머니에 넣어도 뾰족한 끝이 빠져나오기 마련이다.

어쩌면 그녀는 어느 시대에 태어났어도 험난한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신은 그녀에게 미모와 재능을 주고 안온함은 철저하게 도려낸 모양이니.

 

다만, 서리 속에서 꽃을 피우고 향기를 내는 매화처럼

(허난설헌의 오빠, 허봉의 예언한 대로) 봄날의 꽃비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녀의 시를 마주하며 그녀가

산산히 부서지면서도 끝끝내 살아낸 27해를 뒤늦게 응원하며 그녀에게감사를 전할 뿐이다.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그럽더니, (盈盈窓下蘭 枝葉何芬芳)

가을 바람 잎새에 한번 스치고 가자 슬프게도 찬 서리에 다 시들었네. (西風一被拂 零落悲秋霜)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만은 끝내 죽지 않아, (秀色縱凋悴 淸香終不死)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네. (感物傷我心 涕淚沾衣袂) – [감우(感遇)] 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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