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

 

 순전히 보르헤스의 이름만 보고 책을 집었다.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라는 이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온갖 이야기들을 모아놓았다는 의미인가. 언짢은 손이 불만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왜 바벨의 도서관인지 일러주는 페이지에서 나는 머리를 쳤다.

 시력을 잃은 보르헤스는 그동안 그를 인도하고 그와 함께했던 수많은 작가들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고 했다. 어둔 바다를 비추는 등대의 빛처럼,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 줄기 진리처럼.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그를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그의 기억 속에 새겨진 작가와 그들의 글이었다.

 보르헤스가 던져진 바벨 속에서 그는 도서관을 지었다. 수많은 소설가들의 총천연색 이야기들이 진열된 그 도서관은 답답한 흑암 속에서 환히 빛을 내었을 것이다. 그 도서관을 책으로 옮긴 [바벨의 도서관]은 보르헤스와 더불어 그가 기억하는 소설가들을 함께 만나게 한다. 작가를 통해 또 다른 작가를 만나는 것은 [목소리 섬]에서 형체 없이 떠도는 목소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 기이하고 신비한 일이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단편집 [목소리 섬];

 

작가의 이름을 들으면 맨 처음에는 딱 두 가지만 머리를 스친다. 보물섬 그리고 지킬박사와 하이드.

 훌륭한 모험소설로, 이후 각종 모험물에 영감을 공급한 보물섬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도 그렇고, 이중인격을 통해 나타나는 인간의 잠재된 욕망과 복잡한 심리를 그린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기억하는 사람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스티븐슨의 단편집 [목소리 섬]은 다시 한 번 그가 훌륭한 몽상가이자 탐색가 그리고 발굴자임을 증명한다.

 그는 껍질을 벗기고 가려져있던, 인간에게 내재된 선과 악에 접근하기를 즐겨했다. 즐겨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끊임없이 글로 구체화시켜 독자에게 전달했다. 원초적인 세계에의 탐험이자 때로는 나 자신에게 가까이 가는 모험이고 그 끝은 여정에서 캐내온 어떤 감상과 성찰로 갈무리된다.

 목소리 섬, 병속의 악마, 마크하임, 목이 돌아간 재닛. 4가지 단편은 회색빛의 음침하고 기이하면서도 어딘가 분명 낙천적인 색채를 가진 단편들이다. 보르헤스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을 몽상가와 그의 꿈을 동시에 연상하게 하는 작가 (작가와 글을 모두 떠올리게 하는 균형자)라고 평했는데, 위의 단편들을 읽고나면 '이야기(꿈)'의 잔상과 함께 그 이야기를 그려낸 작가 스티븐슨(몽상가)의 이미지가 구체화된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음울하면서도 황량한 자연이 그의 작품에서 많은 배경이 되었다는 작가 소개에 더욱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보르헤스에게만 행복의 형태로 남겨진 것이 아니다. 모험을 꿈꾸는 수많은 탐색가들에게 그는 얼마나 다채로운 공상을 제공했던가. 보이는 것에서 자유로운 보르헤스는 어쩌면 그 자유를 힘입어 스티븐슨이 그려낸 위험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를 몇 번이나 탐험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 스티븐슨이 남긴 행복의 형태가 보르헤스에게 더욱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