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만약'처럼 슬픈 말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조선 말기를 떠올릴 때면 어쩔 수 없이 '만약'을 떠올리게 된다.

만약 그 때 개화가 적극적이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그 때 흥선대원군과 민비가 반목하며 왕실이 분열하는 대신 더 큰 미래를 위해 상생의 길을 걸었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 때 조선의 왕들이 강력한 카리스마와 선구적 안목을 가진 인물들이었다면 어땠을까.

부질없다. 사실 조선 말기, 일본이 결국 조선을 삼키고 한반도를 장악하게 된 것은 비단 말기의 왕들이 잘못된 치정을 해서가 아니라 조선 중기 이후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조정의 문제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섬나라인 일본이 조선에 노골적인 야욕을 보인 것은 조선 말기 뿐만이 아니며 조선의 바람막이였던 청나라조차 서구의 공격에 무너지고 있었다. 과연 어떤 지혜있는 왕이라고 그 시기를 무사히 넘겨 그 거센 식민의 바람 속에서 조선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 조선이 그렇게 사그라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질없는 '만약'을 계속 떠올리게 되는 것은 조금이라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미련이 남기 때문이다. 순하고 어리석어서 미련하게 당하기만 했던 그 눈물나게 분한 시절에 독하고 매서운 왕이었다면 무엇이라도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미련 때문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도쿄 방문기를 그린 [길 위의 황제]를 읽은 것은 그런 미련이 동기였다. 고종 하야 후 3년, 심지어 기록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순종이 분명 독하고 매서운 왕은 못되었겠지만 하다못해 독기와 분기만이라도 탱천한 왕이길 바라면서 책을 폈다.

 

순종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첫 페이지부터 순종이 죽음을 맞는 마지막까지, 역시 그는 독한 사람은 못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시종일관 그는 나약하고 맥없이 끌려다녔다. 끝없는 자책과 자기비하. 무능하고 심약한 스스로에 대한 체념. 죽음조차 자신의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처지에 대한 애통함으로 전전긍긍하다 숨을 거두었다.

마치 산 채로 박제된 것처럼, 궁에 있으면서도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했을 그의 처지가 생생하게 쓰여 있어 나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 동안 내내 풀이 죽었다. 생전 처음으로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난 후, 바닷가에 서서 '나는 황제다'라고 포효하는 자신을 꿈 꿀 정도의 순박하기만한 이 사람이 진심으로 가여웠다. 그러나 그 뿐이다. 가여움, 안타까움.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없다.

고종은 그에게 살아있는 것만으로 일본에 위협이 된다며 살아남는 것이 강한 것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고종은 아들인 그에게 '너의 숨소리는 대한의 칼이요, 창이요, 대포'라고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고 독려했다. 어쩌면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암울한 그 시절, 그래도 아직은 조선의 왕이 살아있다는 것이 일본에게는 불안이요 식민 조선 전체에는 가느다란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해방이 되고 말 것이라는 그런 희망. 그러나 눈물이 울컥 솟는, 순종의 적나라한 심정을 읽은 후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과연 그저 견디고 살아있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을까. 동상에 걸린 손으로 폭탄을 던지고 목숨을 걸고 만세를 외친 백성들이 있는데 그저 답답한 가슴을 치며 조용히 견디는 것만으로 최선이었을까.

책 뒤표지에는 그 남자가 홀로 눈물을 삼키던 밤을 기억하라고 한다. 그러나 기억하고 싶지 않다. 제대로 된 역사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는 있으나 없으나 한 왕이었다. 그 무력하고 나약한 밤을 왜 기억해야 하는가.

저자 박영규는 순종의 애통한 생애 속으로 뛰어들어가 그 절절한 심정을 전달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가 얼마나 한서린 생을 살다갔는지 안타깝기가 그지 없다. 하지만 그 시절, 애통하지 않은 이 어디 있으랴. 도쿄로 향하는 순종을 배웅하며 고개를 숙이고 울던 거리의 백성의 인생이나 울음을 삼키며 무심하게 걸어갔던 순종의 인생이나 짊어진 한의 무게가 어찌 다를까. 도쿄로 향하는 뱃길에서 순종이 새로운 시대의 기로에 선 왕이자 한 인간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지, 그 세밀한 성찰을 그린 것은 좋았지만 그것 뿐이다. 순종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만약에' 라는 가정과 아쉬움은 더욱 진하게 남는다.

 

모르겠다. 그는 최선을 다한 왕이었는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 속에서 그래도 무언가를 해보려고 노력했던 왕이었는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해는 가지만 공감은 가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유독 결과주의자여서 인지도 모른다. 순종의 경로를 따라 각처의 인물들과 부딪히며 겪었을 순종의 시간과 그 속에 담긴 심정을 밀도있게 그려낸 이 작품이 분명 좋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역시 내가 순종에 애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여전히 나에게 그는 조선의 마지막을 지킨 왕이 아닌, 그저 잠시 머물다 간 '길 위의 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