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상륙했다며 각별히 비바람을 조심하라는 일기예보를 들은 날 밤.

 해가 진 후 어둡고 축축한 공기가 도사린 동산에 올라가보자.

 

멀리 태풍 구름이 보내오는 화살같이 독하고 음산한 바람이 나무 사이사이 풀 머리를 헤집으며 땅과 하늘 사이가 온통 요동한다.

발 아래에 까묵까묵 보이는 지붕들 위로 광포한 바람이 희번득거리고 주위를 감싸 안은 날카로운 바람 소리에 뒷골이 서늘하다.

 

록우드가 히스클리프의 저택, 워더링 하이츠를 처음으로 찾아가던 날

음울한 하늘 아래 드센 바람을 맞아 옷깃을 여미며 그는 뒷골이 송연함을 느꼈을터다.

마치 태풍을 불러오는 바람처럼 거칠고 황량한 들판과 저택은 누구에게라도 호감을 줄 수 없었겠지.

하지만 이 음산한 저택과 사람들 사이에 오랜동안 가시처럼 박혀있는 증오와 분노가 자아내는 불안하고 혼란한 기운은 워더링 하이츠를 폭풍의 언덕으로 만드는 그 어떤 요소보다도 강렬한 것이었다.

미칠듯한 바람이 도사린 저택이기 때문에 사람들 역시 격정적인 것인지 혹은 본래 격정적인 사람들이라 그런 저택으로 모여든 것인지 어느 쪽이 확실한지 분간할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히스클리프과 캐더린, 힌들리, 에드거와 이사벨라 그리고 그들 이후로 이어지는 캐시와 린튼, 헤어튼의 격렬하고 불안한 삶은 모두 '애증'으로부터 출발하고 다시 그로 귀의해 끝을 맺는다는 것이다.

 

[폭풍의 언덕]은 인간이 삶을 시작하면서 몸이 밥을 먹듯 정신이 먹어야 하는 감정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수작이다.

 

건강하기 위해 좋은 식재료를 사용한, 영양균형이 훌륭한 음식을 먹는 게 사람이지만 당장 먹을 것이 빈할 때에는 건강이 아닌 생존을 위해 무어라도 먹어야만 한다. 뱀과 전갈 같은 생물조차도 먹을거리가 되지 않는가.

[폭풍의 언덕]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 사람의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감정이라도 먹어치워야만 했던 인물들의 격렬한 삶의 기록이다. 어릴 때 버려진 히스클리프는 사랑을 먹지 못한 대신 증오와 분노를 우득두득 씹어 먹으며 야수같이 자랐다. 타고난 맹랑함과 열정을 품은 캐서린은 아무리 사랑을 던져도 사랑을 먹을 줄 모르는 히스클리프의 곁에서 그와 같은 감정을 먹으며 그와 같은 길을 가는 인생을 택한다. 본래 사람이 사람을 닮는 건 쉬운 일이다. 특히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처럼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며 함께 자라온 사람들에게 더 하고 더구나 그 둘은 자연스럽게 깊고 농밀한 애정을 나누는 사이였으니 서로 닮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터. 그런데 이러한 둘의 애정관계가 둘 만의 관계로 시작하고 끝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고려해 에드거와 결혼했지만 히스클리프를 향해 변함없는 애정을 간직한 캐서린, 캐서린과 그녀의 집안으로부터 능멸을 받았다고 여긴 히스클리프의 깊고 진한 복수는 결국 이 둘의 삶과 그들 주변의 사람들 나아가 그들의 후세에 이르기까지 워더링 하이츠 근방의 모든 삶을 폭풍처럼 집어 삼키게 된다. 히스클리프는 자신이 삶을, 자신을 박대했던 힌들리의 아들 헤어튼에게 재생시키고 캐서린은 자신의 열정적인지만 무모한 생을 자신의 딸 캐시에게 그대로 남긴다.

 

 

 드라마화된 [폭풍의 언덕]에서는 히스클리프의 마초적인 매력을 부각시켜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거칠지만 로맨틱한 그림을 그려내지만 그건 오히려 원작의 마력을 듬성듬성 잘라버리는 일이 아닌가 한다. 사랑과 삶에 미쳐서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폭풍의 언덕]의 인물들은 광적이고 냉소적이며 차갑고 건조하다. 매력적이지 않지만 분명 눅진한 마력이 도사려 히스클리프가 죽는 날까지 캐서린의 망령에 집착하는 모습도, 워더링 헤이츠 근방의 사람들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망령을 빈번하게 목격하는 일도 마치 내가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그려진다.

 

 

 책장마다 줄줄이 눈물 쏟아내는 신파이거나 유쾌하지만 진부한 러브스토리가 아니어서 더욱 좋다. 영국의 음울하고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을 그렸을 에밀리 브론테의 유일한 작품이라는 배경이 주는 서늘한 기운도 좋고 작품 전반을 압도적으로 감싸고 있는 비극의 기운이 결말이 가까울수록 따스하고 밝은 기운으로 서서히 전환되며 평화롭고 잔잔한 엔딩으로 책을 마무리하게 하는 그녀의 세계관도 무척이나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