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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가 깨니 새벽이었다.

어린 나는 답답한 마음에 일어나 앉았다. 엄마는? 하고 이불을 털고 일어나는데 이상했다. 나는 곧 쭈구려 앉아서 정신없이 잠든 내 뒤통수를, 눈썹 옆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수두를 앓고 난 후의 일이었는데 아마 병치레를 하느라 내가 내 정신이 아니었구나 싶은 순간으로 남아있다. 아니면 그 새벽에 꾼 꿈의 일부였겠지.

폴 하딩의 [팅커스]는 첫 장을 넘기는 그 순간부터 내내 이런 감각이었다. 나의 의식이 뒤통수 뒤로 묵직하게 내려앉아 내가 한없이 바닥으로 꺼져 마침내는 내가 누워있던 침대의 바닥이, 우리집 아래층의 천정이 내 머리위로 멀어져 가는 듯한 그런 느낌. 캄캄한 새벽하늘의 별을 하나하나 쳐다보다가 그 별들이 나에게 마구 쏟아지는 듯, 그 까만 우주가 나를 확 덮쳐 아예 집어삼키는 듯한 그런 감각. [팅커스]는 1차원적인 감각의 차원을 뛰어넘는, 말 그래도 초감각의 소설이라는 말이 어울리겠다. 놀라운 것은 그런 초감각의 구상과 현상을 묘사하는 폴 하딩의 아름다운 문장과 그 문장 속에 담긴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유다.

조지 크로스비는 죽음을 앞두고 그의 집 침대에 누워있다. 사경을 헤매는 그는 자녀와 손자조차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환상과 기억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그런 그의 의식 그리고 무의식 속에 그의 아버지, 하워드 크로스비가 홀연히 떠오른다. 하워드 크로스비는 땜장이였고 간질을 앓았으며 시인이었다. 그는 이동네 저동네로 다니며 땜질을 하고 궂을 일을 봐주며 가족을 부양한다. 하워드의 아내, 조지의 어머니인 캐슬린은 엄격한 여자로 하워드의 간질 증상이 심해지자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하나 하워드는 그런 아내의 계획을 알게 되고 집을 나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조지는 아버지 생각을 스스로에게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지는 죽음의 자리에 눕자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아버지를 상상해보고 싶었다. - 본문 p 24~25

아버지가 집을 나간 후 홀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조지와 그 형제들은 아마 아버지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그리움과 상처를 함께 지니고 살았겠지. 한 가정을 이루고 하워드처럼 아버지가 된 조지를, 그의 아버지 하워드가 다시 찾아갈 때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조지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다 사경을 헤매는 지금 이 순간, 그의 의식 속으로 아버지에 대한 생각과 궁금함이 폭풍처럼 밀려오고 거기서부터 소설이 출발한다.

하워드는 생각했다.

....아주 약간만 다른 각도에서 세상을 보아도, 세상에서 우리의 자리는 완전히 달라지잖아.

해가 바닥이 벗겨진 싸구려 접시를 비춰 - 그럼 나는 땜장이가 돼. 달이 잎 없는 나무 둥지 안에서 알처럼 빛나 - 그럼 나는 시인이 돼. 화장대 위에 정신병원 브로슈어가 있어 - 그럼 나는 미치광이 간질병 환자가 돼. 집이 내 뒤에 있어 - 그럼 나는 도망자가 돼......그의 절망은 그의 아내가 그를 바보로, 쓸모없는 땜장이로, 2페니짜리 종교 잡지에서 엉터리 시를 베끼는 사람으로, 간질병 환자로 볼 뿐,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다른 더 나은 것으로 보려 할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왔다. - 본문 p153 ~ 154

조지가 조지의 삶, 그가 살아온 시간들의 흔적, 그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아버지 하워드 역시 그러하다. 정신병을 앓다가 어느 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버린 후 다시 보지 못했던 아버지. 그를 기억하는 하워드는 그렇게 사라졌던 아버지가 이후 그의 일상, 삶 곳곳마다 영혼으로 다녀간 것을 느끼며 그 순간들을 고스란히 가슴속에 간직하며 산다. 그는 이곳저곳으로 수레를 끌고 다니는 고단한 일상과 진흙탕에서, 저녁 식탁 앞에서 등 장소를 가리지 않는 발작 증세에도 절망하지 않는다. 도망가지 않는다. 그를 도망하게 한 것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그의 아내, 그의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어디론가 그를 보내버리려는 그의 아내에게 절망하고 그로부터 도망친다. 하워드는 자신의 아버지가 하지 못했던 ( 또한 조지도 하지 못했던 - 아버지의 발작을 본 조지는 가출을 하려하나 떠나지 못한다) 일에 성공한다. 그 누군가가 아닌 그 자신만을 위해 도망자가 되고 시인이 되어 일생을 마감한다.

스토리가 이쯤되면 하워드는 처자식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새 삶을 꾸린 나쁜 남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 한번도 하워드에 대한 도덕적 비난은 나타나지 않는다. [팅커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그것이 아니다. '아버지 하워드의 가출'은 하워드와 캐슬린, 조지와 그 형제들에게 모두 함께 일어난 사건이지만 하워드에게 남은 기억, 캐슬린에게 남겨진 기억, 조지에게 남겨진 기억이 모두 다르다. 하워드의 기억 속에서 그 가출은 고통스러웠지만 해야할 일이었으며 캐슬린에게는 하워드의 부재가 분하지만 홀가분하면서도 슬픈 일이었고 조지에게는 평생에 남은 트라우마가 되어버렸다.

풀로 만든 그 배들을 바다를 가르는 강철 선체들과 나란히 놓자. 이들 모두가 인간의 백일몽으로 지어진 즉흥 작품이며, 대양에서의 포위 공격으로건 시월의 바람으로건 결국 스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 p96) 모든 것은 파괴되기 위해 만들어져. 어떤 것이 경이롭다면 그것이 아직 파괴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운 거야. 아니야. 그는 생각했다. 어떤 것이 경이롭다면, 애초에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운 거야. 이 만들어지고 부서지는 엄청난 변화를 넘어 계속 유지되는 것은 무엇일까? - 본문 p147

손가락을 시계 안으로 집어넣는다. 탈진 바퀴를 만져본다. 코를 바싹 갖다 댄다. 금속에서 타닌 냄새가 난다. 기계장치에 새겨진 이름을 읽는다. 에즈라 블록섬 - 1794. GEO.E.틱스 - 1832. Thos. 플래치바트 - 1912. 시커메진 기계장치를 케이스에서 들어올려 암모니아수에 집어넣는다...... 시계를 고친다. 네 이름을 덧붙인다. - 본문 p18

인간의 만든 모든 것은 스러진다. 또한 모든 인간도 생물도 시간이 가면 스러진다. 그러나 만들어지고 부서지는 이 엄청난 변화를 넘어 계속 유지되는 것은 그것이 거기 있었다는 그 사실. 그 실상 實像. 오직 그 뿐이다. 거기에 존재했다는 사실, 그 현상 자체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유적처럼 잊히거나 화석처럼 굳어질 뿐. 즉 변질될 수 있어도 무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거기 있었다는 '흔적'이란, 존재가 그 존재성을 가장 강렬하게 증거 할 수 있는 수단이며 방법이다. 그래서 조지는 그의 앞서 존재했던 많은 시계 수리공이 그러했듯 그가 고친 시계에 그의 이름을 남겼다. 흔적이 증거로 남아있는 이상, 아무리 오랜 세월이 가도 그것은 희미해질 수는 있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흔적이 발견되어야만 존재의 존재성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 년 전 지구상에 어떤 생물이 살았다 한들, 그래서 그 화석이 지구상 어딘가에 존재한다 한들 그 화석이 우리에게 발견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이 존재했다는 것을 절대 알 수가 없다. 존재는 그것이 발견될 때 그 존재성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존재를 발견해 줄 또 다른 존재가 필수다. 이 존재가 어떤 자연 현상이나 무생물, 동식물과 같은 경우 그 흔적이란 매우 단순해진다. 그것은 어디에 살았고 무엇을 먹었으며 혹은 그것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이었고 누가 만들었으며 등의 사실 만이 흔적으로 남는다.

그렇지만 사람은 다르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와 내 동생이 기억하는 아버지. 내가 기억하는 내 첫사랑과의 연애와 내 첫사랑이 기억하는 나와의 연애가 다르다. 폴 하딩은 이것에 주목한다. 인간의 무수한 순간과 그 실상들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마다 각각 다르게 기억된다. 이 말은 나의 본질과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나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나를 발견하는 존재들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만 년 전 생물의 화석은 내가 보아도, 내 친구가 보아도 같은 동일한 생물의 화석이지만, 인간이란, 어느 한사람의 인생에 대해 그 한사람을 어떻게 발견하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겐 소중함, 누군가에겐 불구대천의 원수, 누군가에겐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된다.

하워드의 도망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워드 그 자신이 비록 시인이더라도, 그의 존재를 시인이 아닌 바보라고 여기는 그의 아내와 함께라면 하워드의 흔적은 결국 바보로 남을 뿐이다. 하워드가 비록 풍부한 감성과 아름다운 인간미를 지닌 촌부라도, 그의 가족들에게 혹은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그저 간질병을 앓는 괴팍한 늙은이로 비치고 있다면 결국 그 존재의 흔적이란 간질과 괴팍함으로 남겨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하워드는 도망친다. 후에 어느 누군가에게 바보, 땜장이, 정신병원의 간질환자로 존재하는 것을 거부한 그는 도망한다. 도망친 그는 그를 시인으로, 자상하고 따스한 남편으로 대해주는 메건을 만나 드디어 안식한다. 그러나 그 안식의 삶 가운데에는 그가 남겨두고 온 흔적, 캐슬린과 조지와 그 형제들에게 남겨두고 온 흔적이 늘 그림자처럼 그와 함께 한다. 마치 캐슬린이 하워드가 죽은 후에도 내내 하워드에 대한 험담을 입에 달고 사는 것처럼, 조지가 의식적으로는 하워드를 지우려했지만 그의 무의식중에는 늘 어찌할 수 없는 하워드의 흔적이 깊게 남아있던 것처럼. 하워드의 아버지가 사라진 후에도, 하워드는 그의 삶 곳곳에서 아버지가 다녀간 흔적을 느꼈던 것처럼.

2010 퓰리처상 수상작 [팅커스]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하워드의 수레를, 그의 발걸음을 따르는 내내 나는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를 읽으며 느꼈던 시리고 반짝이는 북극 바람의 냄새, 향수 짙은 오래된 일기장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인간 존재의 본질을 그려내는 폴 하딩의 철학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우주에 텀벙 빠져버린다. 우주의 섭리를 아우르는 깊이와 시간과 공간, 물질과 비물질계를 넘나드는 초감각. 거기에 담긴 들꽃향기, 나무 냄새. 폴 하딩의 펜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마치 먼 옛날, 세상의 시작부터 언젠가 있을 내 후손의 후손의 후손의 그림자를 만나는 듯한 이런 느낌은 [팅커스]의 퓰리처상 수상이 우연이 아니며 [팅커스]를 향한 수많은 찬사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확인시켜 준다. 폴 하딩의 놀라운 솜씨에 박수를 보낼 수 밖에.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표현이 이 소설에 대한 가장 적합한 평이 되겠다.

"소설가가 왜 장인인지를 보여주는 놀랍고도 화려한 본보기"

ps. 나의 가슴을 울린 하워드의 절망에 대하여

"그의 절망은 그의 아내가 그를 바보로, 쓸모없는 땜장이로, 2페니짜리 종교 잡지에서 엉터리 시를 베끼는 사람으로, 간질병 환자로 볼 뿐,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다른 더 나은 것으로 보려 할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왔다"

이 절망을 벗어버린 그에게 어울리는 김춘수 님의 시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팅커스, 폴하딩, 퓰리처상수상작, 21세기북스, 땜장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