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 책을 덮는 순간, 어설픈 턱시도 차림에 지팡이를 짚은 이 전설의 희극인이 머릿속을 뒤뚱뒤뚱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아마 ‘진부한 거장’과 ‘양면성’이라는 키워드가 조합해 낸 이미지였으리라. 굳이 ‘진부’라는 부정적인 어감의 단어를 선택한 이유는 작가 자신이 진부함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진부할수록 소중하다는 그의 생각은 곳곳에 등장하는 유명인들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장 뤽 고다르, 마일즈 데이비스, 피카소, 마이클 조던…. 뻔하기까지 한 이 거장들은 소설 속 추억에서부터 미스터리를 푸는 암호, 심지어 농담 따먹기에까지 관여한다. 만약 작가에게 왜 이런 선택을 했냐고 물으면 주인공 하루의 목소리를 빌려 ‘뻔한 게 뭐가 나빠! 진부할 만큼 공감을 사는 가치라는 거야!’라고 대답할 듯하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분명 진부할 정도로 당연한 힘을 ‘거스르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중력 그리고 유전. 이토록 모두에게 공평하면서도 절대적인 힘이 있을까. 선택할 수도, 벗어날 길도 없다. 지구 상에서 중력과 유전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육체의 소멸뿐이다. 그러나 하루와 이즈미는 탭댄스를 추듯 가벼운 몸짓으로 이 거대한 힘에 맞서나간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니 이사카 코타로는 심각한 이야기일수록 가볍게 전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강간, 유전자, 방화…. 짓눌릴 듯한 무게의 이 단어들을 마치 삐에로가 공중그네를 타듯 가뿐하게, 장난 섞인 콧노래처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이 소설이 그렇듯이 말이다.

작가의 이런 가치관은 다른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더할 나위 없는 오락소설들이 묵직한 뒤끝을 남기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한없이 가벼운 말투로 더없이 무거운 이야기를 들은 느낌이랄까? 재미삼아 훔쳐 본 엉뚱한 이들의 장난에서 엉겁결에 무언가를 깨닫게 된 기분이다. 특히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는 책은 제목 그 자체가 작가의 철학이 아닐까 싶다.

진부함을 옹호하면서도 그 방법은 신선하고자 하고, 중요한 얘기를 말장난처럼 하고자 하는 작가는 오락과 깊이, 불행과 명랑함 같은 상반되는 개념을 함께 담아내는 발군의 능력을 지녔다. 다만, 이 개념들은 모두 한 끗 차이이며 언제든지 서로에게 치환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특유의 화법은 보기에 따라 혼란스럽고 무책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 소설 역시 이 이 살인이 ‘범죄’인지 ‘정의’인지 결론을 내려주지 않는다. 결론은커녕, 후반부에서는 이런 모호함을 자백하기까지 한다.

 

“‘네가 한 일은, 굳이 말하자면, 좋은 일이야.’

‘그렇지만 세상의 입장에서는 나쁜 일이야.’

나는, 나쁘면서도 좋은 일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p.458)

 

다만, 중력에서 벗어난 듯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 혼란이 나쁘지만은 않다. 자수에 대한 결론마저 모호하게 끝난 점은 못내 아쉽지만, 이만큼 쉬운 언어로 이토록 흥미로운 양면성의 줄타기를 목격할 기회는 흔치 않다.

그리고 이 목격이 끝나면 마침내 찰리 채플린과의 접점이 뚜렷해질 것이다. 그는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산업화를 풍자했고, 바보스러운 슬랩스틱으로 물질 만능 시대의 인간성 회복을 얘기했다. 어쩌면 하루가 사랑한 간디만큼이나 평화적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을지 모를 이 진부한 인물은, 초 단위로 세상을 사는 지금의 세대에게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진부함은 소중하고, 심각한 일은 가볍게 전해야 한다는 누군가를 위한 증거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