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파크에 나온 책 표지는 백발의 남자와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으로 되어 있지만, 내가 고른 표지는 바로 여성미가 듬뿍 담긴 이 아름다운 여자의 것이다.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추고 있는 이 흑발의 여성은 커다란 두 눈으로 나를 직시한다. 이게 우리가 사랑하고 있을 때의 모습이 아닐까? 전체적으로 주홍빛을 띠고 있는 책은, 사랑의 정열을 암시하는 듯 하다.

 

 사실 나는 기욤 아폴리네르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마리 로랑생의 삶에 깊이 빠져 기욤의 쉽게 변하는 정열적인 사랑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욤이 없었다면 마리 로랑생의 아름다운 그림들도 없었겠지. 이별할 것을 미리 알고 사랑의 슬픔을 피하고자, 사랑의 환희를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이 변덕스럽고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시를 말하는 남자를 거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처음 이 시집을 받아 보았을 때 "마리 로랑생"이 아니라 "루이즈 드 콜리니샤티옹"에 대한 연시를 쓴 이 시집을 읽는 것에 약간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내 여자인 친구를 버린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연시를 보낸 것을 보고 있는 듯한 묘한 느낌!

 여자 보는 눈은 어찌나 좋아서, 한결같이 능력 있고 아름다운 여성들과 사랑에 빠진 이 바람둥이같은 시인!

 

 아, 그러나 그의 시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어 가며 나는 패배감을 느끼고 말았다. 이렇게 정열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를 내뱉는 남자를 거부할 여자는 '완전철벽'밖에 없으리라.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집은 온통 열정 덩어리였다.

 시집의 색깔처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색!

 다 타서 없어져 버리더라도 지금 만큼은 오늘의 사랑을 하는 로맨티스트의 언어들.

 

 시를 읽다 보니 왜 서문에서 그를 아래와 같이 표현했는지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면서 아픔과 상처, 욕망과 희열, 그 모든 빛과 그림자를 하나하나 "기념하듯" 시로 써내려갔다고 고백한 사내.
-서문-

 

 

 시집 첫 장의 이 구절마저 의미 심장하다.

 바다의 거품 속에서 태어난 여신은 단 하나. 미의 여신 비너스

 

 

	바다의 거품은 여신을 낳고 나의 애무는 여자를 낳는다.
-첫 장-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그는 사랑에 빠진 순간, 그 여성을 미의 여신 비너스처럼 느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여성은 아름답고, 그 여성을 사랑하는 남성에게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신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모양의 상형시는, 재미있기까지 하다.

 내용은 에로티시즘의 절정을 달리지만.

 그는 여자가 언제 가장 아름다워지는 지 알고, 그 성숙한 열매를 음미할 수 있는 남자였다는 것을 눈에 선하게 느낄 수 있다.

 어쩜 이렇게 쓸 수 있지?

 

	꿀맛 나는 무화과만이 상처 닮은 그대 달콤한 입술 맛 담고 있지 내가 그렇게 따고 싶어 하는 고상한 과실 너무 무르익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오 무화과 오 탐나는 무화과 내가 따먹고 싶은 입술 나를 죽여주면 좋을 상처
-13P-

 

 생생한 상상과 감동을 집어 넣고 읽으면, 얼굴이 금새 홧홧해 진다. 완전히 노골적인 표현보단 이렇게 적당히 은유적이면서도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문구들이 훨씬 상상을 커다랗게 부풀리니까. 이 시를 받은 "루" 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온통 시로 적어, 긴 글, 긴 페이지, 글자 하나 하나에 온 마음을 담은 이 시를 받는 사람이 내가 된다면, 그 순간 만큼은 온 세상을 다 가진 비너스의 여신이 된 기분일 테다. 이런 시를 여인에게 바치면서, 자신의 모든 마음을 다 바치는데 어찌 여자들이 그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기욤 아폴리네르를 용서했다. 마리 로랑생의 일은 안타깝지만, 기욤 아폴리네르가 훌륭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만나고 다녔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노라고. 그는 전쟁 속에서도 강렬한 사랑의 시를 쓸 줄 아는 최고의 "사랑꾼"이었던 것이다.

 

 

 

<루 나의 장미> 바로 뒤에 있는 이 시는 <루 나의 별> 이다.

 

 너를 위해서는 하늘에서 별도 따다 줄 수 있어, 라는 남자의 말에

 별을 따 달라고 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은 바로 너야, 라고 말 할 것 같은 이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모든 별들의 여왕이라고 경애할 줄 알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찬미할 줄 알고

 오직 그 두 눈에, 제가 사랑하는 여자만 담을 줄 알면서

 사랑을 아름다운 언어로 노래할 줄 아는 이 사람.

 

 

 

 포탄을 찾으러 가면서도

 밤낮 없이 연인을 품에 끌어 안고

 전쟁 속에 시든 영혼을 사랑으로 연명하는 그대.

 

 시집을 읽노라면,

 내 자신이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 "루"가 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루"가 이 시를 받고 어떤 기분이었을 지 알 것만 같다.

 사랑 속에 살고, 사랑 속에 죽을 것 같은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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