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엔딩 크레디트가 흐른다. 극히 조용한, 탄식 같은 피아노 선율. 새까만 화면에 멀리서 빛나는 별처럼 하얀 문자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볼 때마다 생각한다. 영화는 여행이라고  시작과 함께 순식간에 보는 이를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명화란 그런 게 아닐까.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는 여행의 종착역. 방문한 곳을, 만난 사람들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회상의 장소다.
-첫 페이지-

 

 

 

 나에게는 책이 여행이다.

 물론 음악이 최고의 여행인 사람도 있다.

 이 책의 주인공처럼 영화가 그럴 수도 있고.

 

책 표지를 보면, 영화의 첫 제목처럼 떠오른다.

하얀 바탕에 삐뚤빼뚤 개성있게 그어진 까만 글씨, 베이지 색 구름들

그리고 영화 필름 현상기와 새빨간 영화관 의자.

내가 영화관에서 불편하게 느끼는 의자이다.

까만 중절모를 쓴 아저씨의 뒷 머리통이 보이고

왼쪽 새빨간 의자 뒤쪽에는 풍성한 잎을 뽐내는 하얀 꽃이 꽃아져 있다.

 

첫 장을 펼치면, 영화를 사랑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 특유의 느낌까지 사랑하는 소녀같은 여자.

 

나도 여자처럼 영화를 좋아하지만, 역시 영화보다는 책이다.

영화는 가끔 매치되지 않는 배우들이 나와 어색한 연기를 펼치기도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내 머리속에서 상영되는 배우들은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연기, 완벽한 장면을 만들어 내니까.

물론 책보다 훌륭한 영화들이 있다.

영화가 때로는 책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나에게 영화는 책의 연장 선상에 서 있다.

영화를 다룬 책이라, 나는 그것을 또 영화처럼 감상하고

재미있지 않은가?

 

영화를 통해 갖가지 여행을 다니는 여자의 처지는 그다지 편치 않다.

부모님은 맨션의 관리인실에 살고,

어린 시절에 쓰던 낡은 가구들은 방 안을 그대로 채우고 있으며

여자는 관리인 아저씨의 딸이라는 신분에,

17년을 몸바쳐 회사에는 사표를 제출하여 백수다.

게다가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맨션의 관리일을 대신 맡아 보고 있다.

영화와 도박에 빠져 대부분의 돈을 탕진한 아버지.

아버지는 대화 중 종종 명화를 언급하며 주변 사람들을 비유한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간호부장에 간호사를 매치시키거나 하는 식으로.

명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더욱 반가울 것 같다.

 

책은 재미있게도 장동건, 최지우, 배용준 등 한국 유명배우의 이름이 나오기도 하고

한창 인기를 끌었던 미드 <섹스 앤 더 시티>가 언급되기도 한다.

<델마와 루이스>, <신 시네마 천국>, <로마의 휴일>, <모리스>, <죽음의 연대기>, <서스페리아>, <시간을 달리는 소녀>, <킹콩>, <고질라>, <제 3의 사나이> 등등

내가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들도 틈틈이 나오고 있으니 얼마나 많은 영화 이름이 여기에 언급되는 지 모르겠다.

음, 이 책에 나오는 영화를 모조리 나열하는 일도

꽤나 재미있을 것 같다.

 

 

자신의 일, '영화'를 사랑하는 여성이 떠오른다.

우직하고, 여우처럼 행동하지 못 하고 제게 주어진 일을 그대로 해내고

누구보다 '영화'를 사랑하지만

잘못된 일에 떠밀려, 그 상태 그대로 떠밀리는 여성.

 

	영화관에는 키네마의 신이 있고,  아주 어려서부터 그것을 믿었다고
-35P-

 

신들의 나라 일본, 그 일본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답게

아버지는 심지어 영화의 신 '키네마의 신'까지 믿는다.

아버지는 평생을 영화와 도박에 빠져 엄마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버지는 도무지 진심으로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사처럼 느껴졌다.

 

	난, 영화는 혼자 본다....(중략)   아니, 아니, 그러면 안 된다는 소리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펄쩍 뛰어오르거나 소리치기도 해야 해. 영화란 그런 거야. 무엇보다 아유미, 그런 있는 그대로의 너를 보고도 깜짝 놀라지 않을 만한 남자친구가 아니면 사귀는 의미가 없어.
-49P-

 

나는 실제로 영화를 혼자 보지는 않지만,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한국에서는 있기 힘든 일이지만.

뭐, 영화관 안에 혼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고.

미국에서 해리포터 마지막 편을 처음 개봉했을 때,

무려 2시간을 기다려 표를 끊고 보았다.

2시간이 엄청 빠르게 지나갔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각종 해리포터 코스프레를 하고 신나게 놀면서

영화를 하나의 축제처럼

온 몸으로 즐기고 있었다.

영화가 상영할 때도 해리포터가 다치는 장면이 나오면 탄식을 지르고

심지어 어디선가는 훌쩍이는 소리도 들려왔다.

무려 성인들이. 밤이라 성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포터가 마법 주문을 외우면

어디선가 구해 온 마법 지팡이를 함께 휘두르며 주문을 따라 외우고

해리포터가 승리할 때는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들의 생생한 모습을 보고,

아, 이런 영화 문화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어린 아이들처럼 온 몸으로 보는 영화랄까.

4D나 3D도 아니고 심지어 아이맥스도 아닌데, 그 때보다 훨씬 실감이 났다.

결코 잊지 못할 새벽이었다.

 

딸은 관리인 일지, 음 영화일지라고 이름지어야 할 더미를 발견하고 아버지의 글에 놀란다.

그러다 <에이유>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고 들어간다.

 

본인보다 아버지의 글이 재미있다는 하나의 글.

그리고 아버지의 글을 영화의 신 이름을 따서 "키네신"으로 연재하게 된다.

처음으로 인정받는 아버지의 재능, 영화 평론

과연 이 연재는 순탄하게 계속 이어질까?

 

소설을 보면서 많은 부분에 공감이 갔다.

우선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교류하기 위해서 블로그를 운영하고,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며 웃기도 울기도 한다.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블로그에 쓴 책 리뷰를 읽으면서

"아, 이 책 한 번 읽어보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책은 함께 나누고 즐길 때 훨씬 재미있어지니까.

<키네마의 신>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이다.

 

키네마의신, 하라다마하, 일본소설, 일본문학,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