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광고를 들을 때마다, 우리나라 문학 풍토에 그런 책이 있을 수 있겠어? 싶었다. 네티즌 리뷰를 보면 서평이벤트겠지, 싶었다(결론을 말하자면 둘 다 노, 노, 였다).

그렇지만 서점에서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고 휘황찬란하게 전시되듯 눈에 가장 띄는 자리에 있을 때, 마침 용돈도 넉넉하게 막 받았겠다, 산 거였다.

그런데 막상 사고 보니 기대감도 커지고, 정말 범상치 않은 작품일 거라 생각하게 됐다.

사실 그 기대감에 대한 결과가 두려워 책을 펼치지 못했다. 그동안.

어젯 밤 자정에 씻고 들어와 누웠다가 책장에 아슬하게 꽂혀 있는 이 책과 마주쳤다. 잘못해서 떨어지면 책등 모서리가 내 머리를 콕 찍을 거 같아 일단 끌어내렸다. '거대한 상상력, 영웅적 서사, 강렬한 메시지'라는 책띠를 보고, '그래? 재미없으면 다신 책장으로 못 올라갈 줄 알아!'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

웬걸. 약 4시간 반 동안 멈출 수가 없었다. 심각한 사건과 그 사건 뒤의 이상한 낌새를 지루하게 늘어뜨린다거나, 분량채우기식 감상에 젖은 묘사... 그런 것 전혀 없이 비슷한 속도로, 군더더기 없이 행진해나가는 서사의 당당함에 놀랐고, 그 와중에 키득거리게 만드는 유머에도 놀랐고, 시점이 바뀔 때마다 그 시점의 중심인물의 성격이 확확 바뀌는 거에 놀랐다. 잠수? 스노클링? 에 관한 이야기나 댐 관련 이야기, 마을 이야기에 대한 치밀한 묘사력에 놀랐던 건 그 다음이야기다.

거기다 분석해보고 싶은 성격장애나 심리적인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들. 예상치 못한 범인과 결과가 나오는 정도의 본격 추리물은 아니지만 아귀가 맞아가는 사건의 이야기를 현재와 과거시점을 솜씨있게 엮어놔서 재미있었다.

쓰레기 같은 오영제의 폭력이나 사형제도에 대한 의구심에 대해 잠깐 머뭇거리며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최상사'로 나온 최현수의 폭력과, 최현수가 끝까지 아들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의 대비는 서슬퍼런 칼날처럼 예리하고 뾰족하게 독자의 가슴 정 중앙을 과녁으로 맞추는 기분이 들어 기분이 묘하게 나빠지기도 했다. 후반부에 가서는 이야기가 너무 빨리 끝난다는 기분이 없진 않았지만 그게 그동안 절정은 늘릴만큼 늘리는 일반적인 소설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사형제도에 대한 입장은 사실 찬성도, 반대도 아니었다. 강호순이나 유영철같은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들이 죽어야 내 속이 편하겠다는 생각을 솔직히 한 적은 있어도, 누가 누구를 죽인다는 거..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거에 대해서 찬성하기는 어렵긴 했다. 찬성과 반대사이에 내가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구석을 마련하고 남들은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정말정말 처치곤란인 사람들, 사이코패스든, 영리한 정치범이든, 그런 사람들을 사람의 법으로 쓰레기 치워버리듯한 소각시스템처럼 느껴지는 사형제도라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기수로 교도소 수용실이 차고 넘치면, 그런 사람들 밥값을 내 세금으로 내고 있다는 생각이라든가, 위험한 살인마가 화성 어딘가, 서울 서남부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면 당장 사형제도를 찬성하고 싶어진다, 특히 빨리 죽여달라거나, 반성의 기미가 없는 사형수라면... 황당하기도 하고 그렇다. 최현수에겐 어떤 벌이 적당했을까..

그리고 이 소설에서는 여러 가정폭력 장면이 나왔다. 최현수의 아버지 '최상사'의 폭력이 과거에, 혹은 현재의 미개발국가 어딘가에서 자행되는 폭력이라면 강은주가 남편에게 가하는 바가지(언어폭력같았다)와 오영제가 처자식에게 가하는 폭력은 현재의 한국에서 심심찮게 일어날법한 폭력이다(정도의 차이가 있기야 하겠지만). 사실 소설의 묘사보다 무서웠던 건 실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가정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이다. 나름의 생각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행동이겠지만, 제 3자인 독자가 보기엔 전혀 말 안되는 말들. 이렇게 안 맞는 사람이 만나 살거나, 싸이코인줄 모르고 결혼하거나. 정말 최악이라 느낀다. 그걸 견디고 사는 삶이라... 싸이코와 주정뱅이와 사람 피곤하게 하는 주둥이 사이에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아빠의 모습이나 그 아빠의 좌절감을 보고 문득, 혼자 사는게 진짜로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얼풋 들기도 했다;;;

 엄청난 음모에 평범하지 않은 사건 속에 여러 가족의 모습이 나열되는데 영화 '괴물'처럼 평범하지 않은 소재에서 진실한 가족애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책인 것 같다. 영웅이 존재하진 않지만 영웅적인 느낌의 그런 이상하고 재밌는 소설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