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서점 인터파크도서

p129. 금복이 북쪽을 향해 이동하는 동안 사람들은 거꾸로 남쪽을 향해 피난을 내려오고 있었다. 시체는 길거리에 방치된 채 썩어가고 사람들은 그 옆에서 밥을 해먹었다. 사람들은 단지 살아 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p156. 예컨대, 그들이 평생 맛보지 못한 우아한 정취와 로맨틱한 감정, '바람을 맞다'라는 새로운 표현, 미스 김, 혹은 미스 박, 또는 유 마담, 펄시스터즈가 부른 <커피 한잔>의 전국적인 히트, ... 킹 크림슨의 <Epitaph>와 신청곡을 적을 수 있는 메모지, ...

킹 크림슨의 <Epitaph>: http://blog.naver.com/awardman/70132894901

p188.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p343. 그것은 토론의 법칙이었다. 지식인이란 부류는 대개 음험한 속셈을 감추고 있어 좀처럼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론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론 아무하고도 적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대화는 언제나 수박 겉핥기 식일 수밖에 없었으며 약장수는 그 점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p348. 그는 카페를 떠나기 전 좌중을 둘러보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 이보시오들, 이제 심판은 그만두고 링 위에 한번 올라가보는 게 어떻겠소?

<심사평>

p427. 소설이란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소설에 대한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어디까지나 말이 아닌 글의 영역이다.

p439~440. 소설을 쓰다보니까 제 안엔 생각 이상으로 아주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씁니다. 제가 십대와 이십대 때 매혹됐던 한국소설, 예컨대, 황석영 이청준 김승옥 이문구 이문열 같은 분들의 소설 뿐만 아니라 어릴 때 읽은 만화와 코넌 도일 유이 탐정소설, 또 삼국지나 수호지 같은 영웅담이 서라지지 않고 제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을 저는 글을 쓰는 동안 새삼 발견하게 되었죠. 그런데 제가 처음으로 소설이 우리의 인생과 관련이 있구나 하고 뚜렷하게 느낀 작가는 존 업다이크입니다. 사실 [달려라 토끼]같은 얘기가 그다지 흥미로운 얘기도 아니고 그야말로 지지부진한 얘기면서 정서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도 그 징그러울 정도로 세밀한 묘사나 생생한 대사들이 저는 흥미로웠습니다. 이후에 주로 미국 작가들을 즐겨 읽었죠. 훼밍웨이나 피츠제럴드, 그리고 커트 보네거트, 저지 코진스키, 존 어빙, 레이먼드 카버 등등...

큰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고 그런 만큼 플롯이 분명하고, 또 하드 보일드 풍의 주인공 행위가 뚜렷한 소설들에 깊은 세례를 받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랬더니 그것만이 아니라 보르헤스도 좋아한단다. 그리고 그 이유로 "그 사람이 차지하는 20세기 문학에서의 어마어마한 가치나 의미보다는 문장이나 표현이 좋다"는 점을 들었다. 보르헤스의 문장 대부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놀라울 정도로 압축적이라는 것.

p436. 386이라는 말 뒤에는 무수한 개별성들이 존재합니다. 전 그 개별성들 가운데 하나고요. 때문에 소위, 제도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구태여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도 80년대에 이십대를 보냈고 그래서 그 시대의 분위기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웠다고는 할 수 없겠죠.

p443. 최근에 어느 문예지에서 읽은 좌담에서인가... 황종연 선생님이 하신 얘기가 기억납니다. 소설가란 어떻게 보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 안에 축적되어 있는 이야기에 의미 있는 형식을 부여하는 사람이 아니냐, 는.

p451. 사실, '이 소설은 이런 것이다'라고 규정을 해버리면 '과연 정말로 그런 것이냐?' 또한 '과연 그렇기만 한 것이냐?'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됩니다. 결국 허언의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는데... 인터뷰를 하다보니 이 소설은 어쩔 수 없이 작가가 많은 변명을 해야 하는 소설이 돼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p452. 그렇다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의외로 간단한 곳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전의 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이 소설을 통해 받은 자극은 자기화하여 또다른 다로 변신하면 될 터. 위대한 작품이란 항상 읽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는 법이고 사실 이런 작품을 만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열정을 기투하여 문학작품을 읽어왔던 것이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