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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

p8. 나도 젊었을 때는 많은 꿈을 가졌었다. 대개 잊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애석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추억이란 사람을 즐겁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쓸쓸하게 만들기도 한다. 지나가 버린 쓸쓸한 때를 잡아 맨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완전히 잊지 못하는 게 괴롭다. 그 잊혀지지 않는 한 부분이 이제 와서 이 책 <납함(함성이라는 뜻)>을 쓰게 된 원인이 되었다.

p9. 어머니느 체념하시고선 8원의 여비를 마련해 주시며,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우셨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경서를 외워 과거를 치르는 것이 올바른 길이었고, 서양 학문을 공부하는 것은 서양 오랑캐에게 혼을 팔아 넘기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 이상의 수치와 천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머니로서는 이제 당신의 아들을 만날 수 없게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결국 N지방에 있는 K학당에 입학했다.

p10. 그 학년을 다 마치기도 전에 나는 도쿄를 떠나고 말았다. 그 필름을 본 뒤부터 의학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비록 체력이 튼튼하고 오래 산다 해도 고작 보잘것 없는 본보기나 구경꾼 노릇만 할 뿐 아닌가. 병들거나 죽는 사람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것 것은 불행이라고 할 수도 없다.

p10~11. 도쿄 유학생들 중에는 법학이나 정치, 물리나 화학, 경찰학이나 공업 등을 배우는 사람은 많았지만, 문학이나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은 없었다. 나는 이런 냉담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렇게 저렇게 해서 몇 명의 동지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밖에도 필요한 사람을 몇몇 모아 상의한 끝에 잡지를 내기로 했다. 잡지 이름은 그 무렵에 풍미하던 복고적인 경향을 감안해서 '새로운 생명'이란 의미인 <신생(新生)>이라 부르기도 했다.

<신생>이 출판 날짜가 닥쳤다. 그런데 원고를 맡았던 몇 사람이 자취를 감추고 뒤이어 다시 자금책이 달아다 버려, 끝내는 돈 한 푼 없는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시작할 때부터 세상 흐름과 맞지 않는 계획이었던 만큼, 실패했다고 해서 새삼 투덜거릴 것도 없었다. 게다가 남은 세 사람마저도 각자의 운명에 쫓기느라 한자리에 모여 미래의 꿈은 나눌 수조차도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의 <신생>은 태어나지도 못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으로 무력함을 느끼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원인을 알지 못했으나 얼마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한 사람이 어떤 주장을 했을 때 다른 사람이 찬성해 주면 계속 전진할 것이고, 반대하면 자극되어 더 분발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 속에서 외쳤는데도 어떠한 반응도 없다면, 즉 찬성도 반대도 없는 경우에는 마치 자신이 끝없는 벌판에 버려져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그래서 나는 이러한 느낌을 적막이라고 이름 붙였다.

p12. 그 적막감은 나 스스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최면 상태에 들어가 나 자신을 대중 속에 파묻고 옛날로 돌아가려고 했다.

p13. "가령 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세. 그 안은 창문도 없고 절대로 부서지지도 않을 거야. 그 속에는 깊이 잠든 사람이 많이 있어. 그들은 얼마 안 있어 숨이 막혀 죽고 말 거야. 그러나 혼수 상태에서 그대로 죽는 것이니까, 죽음의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아. 이때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다소 의식이 있는 몇 사람을 깨운다면 이 불행한 몇 사람에게 결국 살아날 가망도 없이 임종의 괴로움만 주게 되는데,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나 몇 사람이 깬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수지 못하리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랬다. 나는 물론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희망 그 자체를 말살해 버릴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희망이란 미래의 일이므로,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내 부정만으로 희망에 차 있는 그의 주장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p14. 돌이켜보면 나 자신이 이제는 안타까움이 치솟하도 이미 소리조차 지를 수 없게 된 그런 인간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무렵 내가 빠졌던 적막의 슬픔이 잊혀지지 않아서인지 때로는 나도 모르게 몇 마디 함성이 입에서 새어 나오는 수가 있는데...

(36쪽읽을 차례 - 이 책, 사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