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하루키 아저씨는 참... 애증이다. 딱히 좋다고만도 말 못하고... 하지만, 하루키의 확실히 수필이나, 이런 짧은 글들은 참 좋다.

 

p7. 가와이 씨와 마주 앉아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나는 늘 감탄하게 되는데, 그는 결코 자신의 생각으로 상대방을 움직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오히려 상대방의 움직임에 맞춰 자신의 위치를 조금씩 바꾼다. 예를 들면 내가 그때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자, 나를 (혹은 내 작품을) 유도할 가능성이 있는 말은 아예 꺼내지 않고 작품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얘기를 주로 했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이 몇 가지 있다는 것을 시사하여 결과적으로는 나 스스로 그것을 발견하게 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 이것이 내가 배우고 싶은 대화의 기술

 

p8. 특히 가와의 씨의 빠른 사고방식의 전환과...

 

p13. 특히 미국에서 느낀 것은, 미국에서는 더 이상 개인으로 있기 위해 도망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개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곳이니까, 제가 추구하는 것이 그곳에서는 의미를 가지 못하는 것이죠.

 

p14. "'미안합니다'는 매우 중요한 말이니까, 자신이 나쁜 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문장이 있더군요. 선생님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요. 그러나 자기가 나쁜 짓을 했을 때 외에는 '미안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문화도 있다는 것은 전혀 가르치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서는 '미안합니다'라는 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도덕시간에 그렇게 가리치는 것입니다.

 

p14. 무라카미 : 요즘 들어 개인과, 헌신 또는 관여라는 의미의 커미트먼트에 대해서 자주 생각합니다. 가령 소설을 쓸 때도 커미트먼트가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냉담, 무관심이라는 디태치먼트가 중요했지만요.

 

p22. 말하자면 자신이 받은 상처라든가 정신적 외상, 즉 트라우마를 자기 내부에서 처리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증상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는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기 나름대로 처리하려다가 실패하기 때문에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p26. <일본인과 모래놀이치료요법>

  모래 상자 속에 정원을 만드는 것이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래놀이치료요법은 비언어적입니다. 일본인은 말하지 않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일본에서 특히 모래놀이치료요법이 발전했다고 봅니다.

  서양인이 모래놀이치료요법을 할 경우에는, 정원을 만든 후에 본인이 "이것이 '나'이고, 이 돌은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이 나무는 '어머니'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등등 결국은 언어를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언어와 떨어지기가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거기에 비해 일본인은 "왠지 모르게" 라든가 "재미있으니까"라면서 설명 없이 사물을 배치하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깊은 의미를 가진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p27. 나는 요즘 환자가 상담하러 찾아와도 분석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분석으로 꽤 많은 걸 알아냈는데 요즘에는 별로 그러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 그래요"라고 대꾸만 할 뿐인데, 이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가 좋은 것 같습니다.

 

p27. "목구멍에 뭔가가 끼여 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군요. 큰맘 먹고 말해 보세요"라고 했더니 "사실은 아버지를 죽이고 싶습니다"라도 대답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런 말을 함으로써 상처를 입게 됩니다. 자신이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라고 해도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다시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p28. 때때로 '언어화'에 완전히 반대하고 있는 것처럼 오해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언어화'를 중심으로 심리요법을 하거나, 심리요법가의 '해석'만으로 치료가 된다고 생각하는 데는 반대합니다. 특히 '해석'을 할 때, 자신이 근거로 삼는 이론(대부분의 경우, 서양식 이론)을 기초로 하여 그 틀 속에 환자를 언어에 의해서 꿰맞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여기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p31. 벌거벗고 집안 일을 하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이고 그 기분은 이해가 가지만, 사회 상식으로 볼 때는 좀 극단적이기도 하며...

- 사회상식이란 ... 과연 뭘까?

 

p32. 일본의 <인생 상담>란의 답변은 "네,네"하고 수긍하든가, 아니면 꾸짖든가 둘 중 하나지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러니까 이렇게 하라고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답하는 것은 상담자 자신이 별로 원하지 않나요?

  그래요. 그런 식으로 답을 쓰면, '인정이 없다'거나 '경험이 없으니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다'며 반발을 사게 되죠.

 

p34. <소설가가 되어서>

  "기존의 작가 스타일과는 완전히 반대로 해보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라는 말은 조금 단순하고 과격한 표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단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당시 상당히 반항적인 심정이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분명 몹시 건방진 인간이었습니다. 젊었고 오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필사적이었습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곳에, 어떻게든 스스로 길을 개척해서 제 나름대로의 문학 스타일, 생활 스타일을 구축해 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구축한 스타일 자체는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으며, 어떻게 보면 옛날보다 한층 더 굳어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예전만큼 반항적이지는 않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그동안 제 스타일을 나름대로 분명하게 확립했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반항하려고 해도 반항할 만한 것이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p35. <태엽 감는 새>를 완성한 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제 슬슬 일본으로 돌아가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 생활 끝무렵에는 정말로 무척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특별히 그리운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문화적으로 일본에 회귀하려는 것도 아니었지만, '소설가로서 내가 있어야 할 장소는 역시 일본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어군요.

  그도 그럴 것이, 일본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사고 시스템도 일본어로 되어 있다는 말이니까요. 일본어 자체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니까 일본과 분리할 수가 없는 거지요.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영어로 소설을, 이야기를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은 겁니다.

 

p36. 나의 젊은 시절, 그리고 무라카미 씨의 젊은 시절에는 젊은이들이 비교적 쉽게 '반항할' 상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체제'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반체제'의 형태를 취하면 되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체제'나 '반체제'를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단순한 형태가 아니며, 최근에는 '반체제' 운동에 커미트해 봐야 결과가 얼마나 허망한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든 '반대로 생각하는 것'은 본래의 것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체제'를 분명히 규정하고 그 반대의 '반체제'를 생각하는 방식은 '체제'속에 본질적으로 편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 무엇이든 '반대로 생각하는 것'은 본래의 것과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 이 말이 꽤 쇼크네. 그래서 체 게바라는, 원래 혁명을 하던 나라의 혁명이 완수되자, 체코...던가를 향해 떠난 건지도 모른다.

 

p42. 저는 일본에서 개인을 추구해 나가려면 역사와 더불어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잘 표현하기는 어렵지만요.

 

p42. 영어를 일본어로 번역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대명사입니다. 저는 대명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좋은 번역과 좋지 않는 번역이 가려진다고 생각합니다. 대명사는 '개체에 대한 정의'입니다.

 

p46. 아시아인 독자들이 원하고 있는 것은 디태치먼트입니다. 즉 자신이 사회와 별개의 삶을 사는 것, 부모와 별개의 삶을 사는 것, 그런 것을 제 소설 속에서 찾아내고 어느 정도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국의 신문과 잡지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그런 것만 묻더군요. 하지만 그건 과거에 이미 제 나름대로 해결하고 통과한 일이라고, 솔직히 지금 저에게는 별로 흥미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p46. 나는 <겐지 이야기>를 지금까지 한 번도 끝까지 읽지 않았는데, 미국에 있던 2개월 동안 집중해서 읽었던 겁니다. 그런 기회라도 이용하지 않으면 <겐지 이야기>를 다 읽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이 책은 외국에서 읽어서 더욱 의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의 미국인의 사고방식과 감각을 경험하면서 읽었기 때문에 그 대비가 강하게 느껴지고, <겐지 이야기>의 훌륭함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현재에도 신선함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고요.

 

p49. 제1차 이라크 전쟁에 대한 일본의 교활성과 애매성

- 자기의 나라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라니... 멋지잖아.

 

p51.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주만 공격 50주년이 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제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 아는 게 없지만, 그래도 문젯거리로 대두되었습니다. 다시 저 자신의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돌아보아야만 했기 때문에 그것도 무척 괴로웠습니다.

 

p52. 어느 정도나 교활한가, 교활하기 때문에 생기는 폐해는 없는가를 좀 더 연구해서 세련된 교활함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린데 일본인은 자신들의 교활함을 인정하지 않은 채 교활한 짓을 하니까 비난을 받으면 방어하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 일본인으로 일본인을 돌아보기... 한국인으로 한국을 돌아보기를 실랄하게 할 수 있는 자 얼마나 될까. 이어령님... 쓰셨을까? ... 누군가 뭔가에 대해 쓴 게 있다면 한 숨 돌리고 읽오보고 싶구나. 진중권 아저씨?

 

p54. 그래서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5년 동안 생각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대부분 제1차 이라크 전쟁에 대해 별로 기억하지 않는 것 같지만, 제게는 아직도 그것이 목구멍의 가시처럼 집요하게 남아 있습니다. "모순을 허용해 주는 것이 좋다"라는 가와이 선생님의 말씀은 이해하며,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저 자신도 생각하지만, "그래도......"하는 점은 있습니다.

 

p55 말하자면 그런 매우 명백한 위선을 행하는 나라에 비해서, 우리들은 대단히 애매한 위선을 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비교하자면 결과적으로 어느 쪽이 이득을 보겠습니까? 나는 아직은 애매한 위선으로 버텨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든가, 통합성 같은 것은 이제 그다지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균형은 문제로 삼지만... 요즘 나는 이런 것을 생각합니다.

  무라카미 : 지금의 저에게 그것은 소설, 이야기의 본질입니다. 저는 소설에서 균형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통합성은 필요 없으며 정합성과 순서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 역시 다음 읽을 책은<태엽감는 새>구나.

 

p57. "어떤 메시지가 있어서 그것을 소설로 쓴다"라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제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제 속에 어떤 메시지가 있는지 찾아내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쓰는 도중에, 그런 메시지가 어둠 속에서 문득 떠오릅니다. - 대개의 경우 알 수 없는 암호로 쓰여 있지만요.

 

p58. 또 한 가지, 매우 자연적인 이야기라야 합니다. 이것이 이렇게 되고, 이렇게 되어서, 하는 식으로 계획적으로 쓰는 것은 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다음에 무엇이 온다, 그 다음에 무엇이 온다는 식으로 써나가다가 마지막에 결말을 냅니다. 결말이 없으면 소설이 되지 않으니까요.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전체를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일단 쓰는 행위 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면서도 끝에 가서 용케 결말을 낸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저는 프로 글쟁이이므로 결말은 반드시 있습니다.

 

p58,59. 그때까지의 일본 소설의 문체로는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시간이 걸렸던 겁니다.

  하지만 저는 소설가로 글을 써나가기 위해서는 문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디태치먼트, 아포리즘 부분을 차차 '이야기'로 대체시켜 갔습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양을 둘러싼 모험>이라는 장편입니다. 제 경우에는 작품이 점점 길어졌습니다. 길게 쓰지 않으면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다 보면 점점 길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까지 왔어요.

  그 후 제가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 이쯤에서 리얼리즘의 문체를 제대로 익혀야게겠다고 생각하고 쓴 것이 <상실의 시대 (원제:노르웨이의 숲>입니다. 이것은 일본을 떠나서 쓴 첫 장편소설입니다.

  그리고 이번의 <태엽 감는 새>는 저에게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는 이야기가 이야기인 것만으로도 기뻤습니다. 아마도 저는 그것이 제2단계였다고 생각합니다.

  <태엽 감는 새>는 제3단계입니다. 우선 아포리즘과 디태치먼트의 단계, 다음에는 이야기를 만드는 단계, 그것들을 거치고 나면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 시점에서 커미트먼트라는 것이 관련되겠지요. 아직 잘 정리하지 못한 상태지만요.

 

p59. "프로니까 결말은 난다"라는 것은, 쉽게 말해 결말이 나지 않으면 소설가로서는 먹고살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얘기인데, 그와 동시에 '자신을 믿는다'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 다음은 경험이 중요하지요. '이대로 괜찮을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문제없다'고 자신을 설득하며 계속 글을 써나가는 것입니다.

 

p60. 지금까지 한 것 같은 "당신이 말하는 것은 잘 알겠다. 그러나 손을 잡자" 라는 식이 아니라, '우물'을 파고 또 파 내려가 그 밑바닥에서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벽을 넘어서 이어지는 그런 색의 커미트먼트에 저는 무척 끌렸습니다.

 

p60. <옴진리교 이야기의 유치함에 대해서>

  과격한 표현을 쓰자면, 그것은 일찍이 '청춘'이니 '순애'니 '정의' 같은 것이 작용한 것과 같은 수준으로 사람들에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것은 유치하다. 무의미하다"라는 식으로 간단히 무시해 버릴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p67. 가와이 : 상대방에 따라서 다릅니다. 서로의 관계가 깊어지면 길어질수록, 때로는 위험해지기도 합니다.

  무라카미 : 상대방의 문제가 자신에게 옮겨오는 경우도 있습니까?

  가와이 : 있지요.

 

p68. 무라카미 : 한번 여쭤보고 싶었는데, 부부란 일종의 상호 치료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와이 : 엄청나게 많이 있지요. 그래서 괴로움도 그만큼 신한 것 아니겠습니까? 부부가 서로 이해하려면 이성만으로 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물'을 파야 합니다.

  무라카미 : 저도 결혼한 지 25년이나 되었는데, 그 말씀에는 깊이 공감합니다. 지금까지는 너무 가까이에, 절실하게 있기 때문에 아내에 대해 쓸 수가 없었습니다.

  제 소설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혼자였습니다. 제 소설에는 부모가 나오지 않습니다. 자식도 나오지 않고 아내도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오는 것은 친구나 창녀 정도였죠.

 

p70. "우리는 괴로워하기 위해서 결혼한다"라는 가와이 선생님의 정의는 매우 신선하고 재미었었습니다.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씀하시면 모두 난처해지지만 말입니다.

  저 자신은 결혼하고 나서 오랫동안 막연하게 결혼 생활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서로 메워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조금 달리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은 오히려 서로의 부족한 점을 마구 들추어내는 - 큰소리로 말하거나 말을 안 하는 차이는 있을지라도 - 과정의 연속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p71. 나쓰메 소시키의 <문>에 나오는 부부였습니다. ... 남편은 결국 중이 되지요.

  가와이 : 중이 되지만 다시 돌아오잖습니까? 부부의 일이란 소세키가 쓴 것처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물 파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태엽 감는 새>는 정말로 대단한 커미트먼트 이야기입니다.

 

p71. <괴로워하기 위한 결혼>

  그것은 결혼이 갖는 어느 한 면을 강조해서 말한 것입니다. 뒤에서 부부라는 것을 "이보다 재미있는 것도 없다"라고 말했으니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말로 '재미있는' 일 중에서 고통이 따르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튼 생각해 보면 무서운 일입니다"에 동갑입니다. (가와이)

 

p72. 무라카미 : 맞아요. 그리고 또 한 사람, 마미야 중위는 자신의 인생을 떠맡기려고 하죠. 주인공은 여러 가지 형태로 커미트먼트를 강요당합니다. 아내 구미코만이 도망칩니다. 떠나는 거죠. 하지만 주인공이 진정으로 커미트하고 싶어하는 상대는 바로 그녀입니다.

  가와이 : 달리 표현하면, 그때까지 커미트해 온 사람들은 구미코에게 커미트하기 위한 통로 같은 것이라고 하면 될까요?

  무라카미 : 이야기의 처음에서는 주인공에게는 구미코에게 커미트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우물을 통과하는 것은 그 자격을 얻기 위한 것으로, 오페라 <마적>에서 말하는 시련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다 쓰고 나서 생각한 것이긴 하지만요.

 

p74~75. 가와이 : 서양의 경우는 '로맨틱 러브'가 기본이 되고 있지요. 그런데 로맨틱 러브의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만일 로맨틱 러브를 오래 지속시키고자 한다면 성적인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성적 관계를 가지면서 로맨틱 러브를 오래 유지하는 건 불가능해요. 부부 관계를 지속해 나가려면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무라카미 : 그 성적인 관계에도 일종의 치유 작용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느 시점에서 다른 형태의 치유 작용으로 변해야 하는데... 그때 '우물 파기'가 필요한 걸까요?

 

p76~77. 가와이 : 일본인에게 부부란 종교를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무라카미 : 저는 격투를 하고 있는 기분입니다.

  가와이 : 그렇습니까? 결국 완전한 답은 얻을 수 없으며,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선 존재와 마음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p82. 제가 좋아하는 미국 작가 중에 존 어빙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현대 미국에 이야기를 부활시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82. 하지만 저도 나름대로 나이를 먹어서 아는데 "계속 기분 좋게 지낸다"라는 건 말은 쉬워도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냥 잔디밭 위에 누워 있어봐야 사과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계속 기분 좋게 지내려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쉽게 해결하려고 하면 결국 약물이나 매춘 같은 쪽으로 흐르기가 쉬운 거지요. 귀찮게 이런저런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새로운 시대의 윤리성 같은 것이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 귀찮대... ㅋㅋㅋ

 

p83. 벽을 통과하는 '가베누케'

...

  '우물'에 들어가서 '가베누케'같은 것을 하려고 할 때도 체력이 없으면 이미지가 달라집니다. 벽을 통과하는 데도 힘이 필요하니까요.

  정말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은 가베누케 같은 것을 머리로 지어내는 겁니다. 그건 안 됩니다. 나는 그런 것을 '지어낸 이야기'라고 합니다. '지어낸 이야기'에는 몸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머리만으로 만든 것이지요. 독자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p84. 모래놀이치료요법에 대한 강습회에서 아주 아름다운 꽃을 듬뿍 사용한 만다라를 만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고 전혀 감동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만든 사람에 왜 이런 것을 만들었냐고 묻자, "모래놀이치료요법이라는 게 만다라를 만드는 것 아닙니까?"하고 말하더군요. 어딘가에서 듣고 와서 만다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것은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게 아닙니다.

  무라카미 :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사람도 물론 있겠지요.

  가와이 : 그런 사람이 만든 걸 보면 모두 무척 감동합니다. 그게 참 신기한 일입니다.

  무라카미 : 그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가와이 : 거기에 투입하는 에너지의 양이 어딘가에서 전해지는 거겠지요.

- 여기에 두 사람의 대화를 적어나가면서, 무라카미씨는 남자로서 개XX가 아니고, 작가로서 솔직하고 용기있게 자기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것에 이제 더 점수를 준다. (그전에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부끄럽지만, 그 단계를 거쳤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무라카미씨는 단지 성별이 남자일뿐이다. (얏또 - 일본어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로 소설가를 전부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물론 소설가를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소설은 소설 그 이상, 예를 들어 작가에 대해 궁금하고 상상하게 되는 소설이 있다. 무라카미씨의 소설이 그렇다. 역시 나는 앞으로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무라카미씨의 소설과 에세이들을 읽겠지. ㅎㅎ

 

p85~86. 가와이 : 네, 병이 있는 사람은 좀 다릅니다. 병이 있는 사람은 박력이 있어요.

  무라카미 : 각자 나름대로 박력이 있단 말씀입니까?

  가와이 : 네,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다만 병든 사람에게 모래정원을 만들라고 해도, 두려움을 느끼는 환자는 모래정원을 만들지 않습니다.

  무라카미 : 지어낸 이야기를 만드는 병이 있는 사람은 없겠습니까.

  가와이 : 그런 사람은 아무래도 마음의 병이 든 사람들이니까 만들 수 없지요.

  무라카미 :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것이군요.

  가와이 : 그렇습니다. 더 이상 도망칠 수가 없는 거지요. 찾아오지 않거나 모래정원을 만들지 않게 됩니다.

  무라카미 : 그럼 병든 사람이 만들면, 나름대로 이야기가 된다는 얘기군요.

  가와이 : 병든 사람이 모래정원을 만드는 경우, 그것이 변해 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직어 보면 아마추어라도 대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이 모래정원에 꾸며놓은 물건은 정말 아무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른바 '정상인'은 시시한 것, 일탈하지 않은 물건을 꾸며놓는 재능을 갖고 있는 거죠.

  무라카미 : 말하자면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해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일종의 그런 재능이겠군요.

  가와이 : 재능입니다.

  무라카미 : 그러나 그 병든 사람이 만든 것들 중에도 매우 재미있는 것, 대충 재미있는 것 등 수준이 다르겠지요?

  가와이 : 어느 정도는 다르죠. 깊이에 차이가 있으며 더러는 대단한 것도 있습니다.

  역으로 '정상인'이라는 사람이 최선을 다해 커미트해서 만든 것은 정말 굉장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으로서는 무척 힘든 일을 하는 것이므로 어지간히 조건이 잘 갖추어지지 않으면 할 수 없지요.

  무라카미 : 만든 사람의 병의 깊이와 그것을 남이 보았을 때의 감동의 크기는 비례합니까?

  가와이 :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건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병이 너무 깊으면 그 전부를 표현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일부만 표현하거나 오히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앞서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의 깊이와 작품의 깊이는 다소 일치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p90~91. 무라카미 :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컨대 모차르트나 슈베르트 같은 사람은 그것이 나타나는 기간이 매우 짧았다는 겁니다. 매우 자연스럽게 나타났다가는 갑자기 사라져 버립니다. 육체가 따라 가지 못하는 경우도 물론 있었겠지만요.

  반면에, 그렇지 않고 반복적으로 변증법적으로 신장해 나가는 베토벤이나 말러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가와이 : 그것은 개성이라고 할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모차르트 같은 사람은 정말로 그 작품의 희생자라는 느낌이 듭니다.

  무라카미 : 저 자신은, 반복하며 변증법적으로 해나가는 타입이라고 생각합니다.

 

p91. <'사소설'을 둘러싸고>

  일본에서는 자기와 타인의 구별이 서양처럼 명확하지 않아서, '나'라고 말해도 그것은 '세계'와 동일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애매함을 적절하게 이용한 사소설은 서양인이 '자기 자신'을 얘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 사소설이 성공했을 때는 신변의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이 '세계'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의도를 가지고 쓴 겁니다. 다만 이것이 국제성을 갖기는 극히 어려울 겁니다. (가와이)

 

p93. 그러나 작품은 작가를 뛰어넘지 않으면 재미가 없어집니다.

 

p95~96. 그 후 이야기는 현실과 다르다고 해서 평이 나빠졌지만, 옛날에는 이야기와 현실이 뚜렷이 나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경우, 특히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경우에는 신과 인간의 매개체로서의 이야기가 성서에 써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절대적으로 정통적인 것, 바이블, 즉 책이며, 그 외의 이야기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외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곧 신성 모독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좀처럼 이야기가 생겨나기 어려웠고, 인간이 신에 대해서 어느 정도 힘을 갖게 된 무렵에 이르러서 드디어 <데카메론>과 같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무라카미 : 르네상스 무렵이지요.

  가와이 : 그제야 다른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대신 얼마간 안티 그리스도적인 이야기여야 했죠. 어느 정도 신에게 대항하는 이야기를 만들어야 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이 탄생했다고 생각합니다.

 

p96. 무라카미 : 무라사키 시키부의 경우 매우 의식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이야기의 방식과 구조가 매우 복합적입니다. 단순히 공기처럼 이야기가 거기에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는 미흡한 것 같은데요...

  가와이 : 그래요.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야기를 만드는 개인이 존재해야 하지요. 그런 점에서 당시의 여성은 개인일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남성은 전부 조직에 속해 있지 않았습니까? 여성도 신분이 높은 사람은 조직에 속해 있었지만, 그런 사람을 섬기는 무라사키 시키부 등은 굉장히 자유로웠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 무렵의 이야기는 대부분 여성이 썼다고 봅니다. 남성이 쓴 것은 없지 않습니까?

  무라카미 : 여성들이 사회적 시스템에서 한 걸음 물러난 곳에 있었다는 것이군요.

  가와이 :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래서 시간도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돈도 있었고, 모든 것이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력을 해도 자신의 지위가 올라가는 일은 절대로 없었죠. 그런 여건이면서 머리도 좋았기 때문에, 이야기 쪽으로 힘을 쏟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p96. <개인으로서의 여성>

  일본적 체제에 편입되어 있다. 시간과 돈도 어느 정도 있다. 출세나 축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이런 조건들은, 현재 일본에서 창조적인 일을 하고 있는 여성에게 그대로 해당됩니다. 지금 일보에서 씩씩하고 자유롭게 창조성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은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요? 현재 일본의 사무라이는 여성들이고, 남성 사무라이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와이)

 

p99. <일본의 이야기>

  일본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물건'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혹은 '물건'이 얘기를 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때의 '물건'은 서양의 물질(物質)과는 전혀 다르며, 사물에서부터 인간의 혼까지도 포함하는 광범위한 존재입니다.

- 物語 아, 모노가타리...가 이런 뜻이구나. ㅎㅎ 하나 알았다! 기쁘다! 꺅!

 

p100. 가와이 : 현대의 소설에서는 우연히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발생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쓸 수 없습니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써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재미있는 우연이 많이 있어요.

... 내가 그 얘기를 하면, 모두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어요?"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있었떤 일인 걸 어쩝니까? 현실을 그대로 예기하는데도 모두 "이상해, 이상해"하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두 '현실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근거 없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p102. 저는 소설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는 오히려 그 느린 대응성과 적은 정보량, 수공업적인 고생 (혹은 어리석은 개인적 영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유지하는 한 소설은 힘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이 경과해서 그런 대량의 직접적인 정보가 썰물이 빠지듯 빠져나갔을 때 비로소 뒤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p103. 그렇기는 해도 한 사람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주는, 앞에서 말한 경향이 개인주의를 외치는 서양에서 생겨났다는 아이러니에 대해서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삶의 방식이 개인에게 가장 상처를 주는 경향을 낳고 있는 것입니다. (가와이)

 

p107. 의사가 환자를 한 사람의 남성 또는 여성으로 대하면 안 됩니다. 의사는 환자 뒤쪽에 앉아서 메모만 하는, 완전히 중립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환자가 분석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전이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좋아하는 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하고 분석이 가능해지는 것이죠.

 

p108. 그런 식으로 계속 분석당하는 건 강한 환자가 아니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분명하게 썼습니다. 환자는 분석자와 함께 자신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해야 하며, 그것을 견뎌낼 수 없는 약한 사람에게는 정신분석을 해서는 안 된다고요.

 

p108. 그리고 환자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렇습니까"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 되는데, 그때 나 자신의 감정을 그다지 숨기지는 않습니다.

 

p109. "선생님, 쉬운 해결방법이 있어요. 나는 선생님과 함께 자면 나을 거예요. 함께 침대에서 자고 나면 나을 테니까 어디 다른 곳으로 가요."라고요. 그러면 나는 "당신 말이 옳아요. 하지만 인간은 옳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어요. 유감스럽지만 그 옳은 일을 할 수가 없군요."하고 말합니다. 그 사람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자고 말하면 그 사람도 이해합니다.

 

p110. 그러나 낫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그게 중요한 점입니다.

 

p110. <소설은 작가와 독자를 동시에 치유해야 하는 것>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소설을 씀으로써 자신이 치유되는 경우가 있지만, 물론 동시에 독자도 치유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설로서 작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독자의 어떤 부분을 다소나마 치유한다는 것일 뿐, 소설이 마법의 지팡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작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비록 부분적이나마, 잘만 되면 그 작용이 다시 작가에게 피드백되기도 합니다. 그렇게해서 다시 자신이 힘을 얻고 치유되기도 하는 거죠. 많은 작가는 그것을 '반응'이라고 부릅니다. 그 반응이 없으면, 작가가 오랫동안 작품을 써나가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와 동시에 증오의 피드백과 같은 것도 있습니다. 플러스 작용의 이면에는 반드시 마이너스 작용도 있습니다. 이따금 그것을 느끼고 괴로워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작가란 그러한 마이너스, 즉 증오도 나름대로 모두 받아들이고 소설을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깊이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진짜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p112. 영화 <가이아 심포니> ... 메이욜 씨에게 "왜 잠수를 합니까?"하고 물었더니, "나는 돌고래가 됩니다"하고 대답하더랍니다. 잠수하기 전에 앉아서 명상을 한대요. ... 그는 '나는 돌고래가 되었다!"라는 생각이 들 때 물에 들어갑니다.

 

p113. 산소통 없이 세계의 8천 미터급 산을 모두 올라갔던 라인홀드 메스너라는 사람도 나옵니다. 그 사람에게도 물어보니 같은 말을 하더라는 겁니다. "나는 산이 됩니다" "산이 되기 때문에 그곳까지 갈 수가 있습니다" 라고요.

 

p115. '죽임으로써 치유되는 사람'이 정말 있는 모양이군요. 저는 지금 게리 길모어라는 실제로 존재했던 미국의 연쇄살인자의 이야기 <내 심장을 향해 쏴라>를 번역하고 있는데, ... 이 책을 읽으면 "인간의 마음이 이처럼 먼 끝까지 몰려야 하는가?"하고 깊은 생각에 잠길 정도로 강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대단한 책입니다.

 

p119. 우리의 방식은 종교가의 방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도그마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지요. "염불을 외면 구원받습니다"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스스로 찾아내는 것을 존중합니다. 다만 그 사람이 찾아내는 것이 현대 사회와 공존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는 함께 생각합니다.

 

p119. 무라카미 : 그것은 일종의 암호로 묶여 있는 상태라서, 누군가가 그 암호를 풀어주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없지 않을까요?

가와이 : 그렇습니다. 옴진리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모두 구원받고  싶은 사람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오시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소용없으며 "당신은 이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 있어야 나올 것입니다.

 

p121. 본인이 굳이 그런 곳에 가겠다고 하면 내버려두긴 하지만, 나는 비교적 신중한 사람이라서 그것이 생명과 관련된 곳일 때는 사실 걱정이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이 돈입니다. 그래서 돈에 관련해서도 충분히 주의를 주고 어느 정도 돈을 요구하는지 물어봅니다.

 

p122. 저는 소설 속에서 초자연현상이나 초현실적인 것에 대해 자주 쓰는데, 현실 생활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런 것을 믿지 않습니다. 전혀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p127. 저는 평소에는 그렇지 않지만, 소설을 쓸 때는 죽은 사람의 힘을 매우 강하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소설을 쓰는 것은 저승으로 가는 감각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죽음을 미리 경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p131. 마치 영화 <이지라이더>의 마지막 장면처럼요. 물론 그것은 최후에는 힘에 의해서 쓰러질 숙명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시대에 폭력이 환기하는 아드레날린 냄새를 또렷이 맡았지만, 그것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기억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