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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으로 출장을 가는 남편이 기차 안에서 읽을만한 책을 달라고 하였다. 전날 빌려온 책을 건넸다. 잠깐 훑어보더니 얇은 책인데다 저자가 신영복 선생인 것을 보고 바로 가방에 넣었다. 다녀온 남편에게 무슨 내용이더냐고 물었더니 엉뚱한 대답만 한다. "하의도와 봉하마을을 한번 가야겠어." 정치에 별 관심도 없고, 먼 길 운전이라면 너무나 싫어해서 3시간 반 걸리는 처가 가는 길도 고속버스에 몸을 맡기는 사람인데 말이다. 나 또한 신영복 선생의 존함만 알고 엽서를 얼핏 읽었던 사람이었다. 남편의 낯선 말이 바로 책을 붙잡게 했다.
경향신문사에 실렸던 '변방을 찾아서'의 기고문이라고 한다. 그 기고는 완성되지 않은 채로 끝났고, 이 책 또한 권유에 못 이겨 출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기획이 참 좋았다. 저자가 그동안 썼던 글씨들을 찾아가는 답사 기록이었다. 저자는 저자의 생명력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글씨가 지워져 보이지 않기도 하고, 방치되고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하고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으면서 자신의 사그라져가는 육신도 확인하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제는 그는 가고, 글씨만 남아 있다. 책은 참 담백하다. 그의 글씨들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생겼다.
폐교 위기의 서정분교를 살리기 위한 마을의 노력으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학교를 살리는 것은 마을을 살리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과 학부모들은 방과후수업에도 열심히 참여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의 글씨는 '꿈을 담는 도서관'이다.
신사임당과 이율곡에 비하면 변방인 것같은 허균과 허난설헌 기념관, 지명으로만 남아있고 걷기보다는 달리는 고개가 되어버린 박달재,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평가가 양분되는 홍명희의 문학비, 마음을 씻어준다는 오대산 상원사비의 이야기는 내가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전국을 찾아 구석구석 누비는 것같은 느낌을 준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타종을 하며 저자는 서울시홍초 졸업생인 기형도 시인을 소개한다. 종소리를 들으며 소리의 뼈는 침묵이라 했던 꽃같은 시인을.
저자의 애정이 묻어나는 전주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고, 나 또한 역사의 꽃이 된 죽음 앞에서 먹먹해졌다. 20년 수형 생활의 마지막 3년을 보낸 곳이며 출소한 곳이 바로 전주라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전주를 햇볕이라고 표현했다. 518 광주민주항쟁의 최초 희생자가 이세종 열사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당시 계엄군이 광주만 진압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집단 구타를 당하고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젊디젊은 청춘 앞에 고개가 숙여졌다. 모든 죽음은 거대한 상실이라는 한 줄에 나는 내 청춘을 상실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외면했던가를 한참 생각했다.
글씨라기보다는 상형문자요, 디자인 같은 '서울' 글씨가 신영복 선생의 작품이었다니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변방은 공간적 장소가 아니라 권력적 대상이기도 한다. 북악은 권력의 중심이라면, 한강은 권력의 변방이었다. 산과 물이 오래된 친구이듯 권력과 민심도 서로 공감하고 소통해야 한다는 당부를 오늘의 우리가 꼭 지켜가기를 바란다.
봉하마을은 이 책의 마지막이면서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변방이다. "누구도 광주의 비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듯이 누구도 노무현의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작년에 개봉한 '택시운전사'를 보고나서야 나는 광주의 비극에 사죄를 했다. 열한 살에 보고 느꼈던 일을 마흔여덟이 되어서야 누군가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고, 애써 외면했던 80년대 운동권 친구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냥 가슴 속 깊은 곳에 있었던 은밀한 비밀 같은 그것은 표현한다고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으로 맞선 학우들의 시위 현장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며 나만을 도모한 내가 오히려 그들의 상실로 지금의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으니. 지식인이 되기 위해, 중산층이 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나를 가장 부끄럽게 한 이가 있으니 바로 노 전 대통령이다. 정말 몰랐다. 그렇게 가실 줄은. 남편과 함께 욕도 정말 많이 했다.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독단이라고 삼삼오오 모이면 이야기했다. '스스로를 추방한 자'(승효상 표현)라며 운명의 길을 간 그는 그렇게 변방으로 살다가 작은 돌이 되었다.
마을에는 학교가 있고, 기념관이 있고, 고개가 있고, 유명한 작품이나 비석이 있고, 절이 있고, 관공서가 있고, 사람이 있다.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마을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사람이다. 그 사람은 바로 그 공간에 서 있는 누군가이다. 내 마을이 변방이라고 느낄 때가 바로 새로운 시작이다. 중심 또한 처음부터 변방이었을 터이니. 마을은 있되 사람에게 생명력이 없다면 그것은 거대한 소멸이다.
신영복 선생의 글씨가 오래도록 마을을 지키고, 변방을 지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