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색채는 자연스러운 어떤 것인가?

이 연구는 영화색채의 문화정치적 분석이다. 문화는 서로 이질적이거나 유사한 집단 간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힘들이 충돌하는 장소다. 비판 문화연구는 정치를 일상문화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엘리트적 엄숙주의와 권위적 특권을 해체시키고 기존의 의미를 혁명적으로 확장시키려는 의도에서 문화 자체를 정치로 보는 태도를 견지해 왔다. 이러한 문화정치의 차원에서 영화색채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것이 이 연구의 의도다. 이를 위해 먼저 문화현상과 색채의 관계, 색채 효과의 과정 및 의미를 분석하였고, 두 번째는 텍스트 분석으로 몇몇 영화들에서 보이는 색채의 의미를 고찰하였다. 세 번째로는 인터뷰 방식의 현장관찰로서 문화현상으로서의 색채와 텍스트의 영화색채에 대한 수용자의 수용 양상 및 생산 과정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연구 수행의 목적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상식의 생산 과정이 이데올로기라고 한다면, 영화색채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가장 잘 봉사하는 것으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주류 영화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영화의 시각장치로서 영화색채는 다른 형식으로도 기능할 수 있었다. 주류 혹은 지배 내러티브에 종속되어야 했던 영화색채의 사용에 어떠한 형태로든 대항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영화색채는 내러티브를 포함한 영화 장치의 다른 요소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독자적 가치를 갖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색채의 역사를 둘러싼 주류와 비주류 혹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는 현재까지도 순환의 양상을 보이면서 지속되고 있다. 이 연구는 의미투쟁의 장에서 영화색채가 어떻게 재현되고, 그 의미의 복수성이 무엇인가를 분석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연구 문제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 영화색채가 등장한 초기부터 1970년대 말 주류가 되기까지, 그것이 자연스러운 어떤 것으로 내러티브에 종속되어야 했던 과정과 배경 속에서 색채 테크놀로지와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관계 맺는가? 이 같은 문제의 상정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가장 잘 봉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영화색채의 테크놀로지와 산업 요인이 사회ㆍ경제 컨텍스트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으로서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둘째, 영화색채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토대로 할 때, 지배 경향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며 어떻게 결정되어 왔는가? 이데올로기는 지배 권력에서 나와 그것을 자연스럽고 상식의 어떤 것으로 재생산하는 무의식이기 때문에, 영화색채가 지배 이데올로기를 지지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을 역으로 추적함으로써 그 의미를 밝힐 수 있다. 셋째, 그렇다면 영화색채는 항상 종속된 요소로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봉사만 하는가? 지배적 의미화의 대안으로, 자율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기능하지는 않는가? 그러한 저항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는 영화의 재현 전략이 사회 상황에 따라 상이한 효과를 보인다는 관점에서 너무나도 다양하고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는 현대사회, 특히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영화색채가 갖는 의미를 분석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이와 같이 상정된 연구 문제들을 풀어나가기 위해 다음의 방법을 동원한다. 먼저, 첫 번째와 두 번째 연구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영화색채의 테크놀로지가 등장해서 주류가 되기까지의 흐름에 관련된 문헌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영화 색채미학의 완전성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이 결국 지배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과정임을 밝힐 수 있다. 세 번째 연구 문제를 수행하기 위한 두 번째 방법은 영화색채의 의미생산 과정에 주목하면서 에드워드 브래니건(Edward Branigan)이 시도한 색채 분절화와 엠마 윌슨(Emma Wilson)이 차용한 크리스테바의 개념들이다. 브래니건은 영화색채의 대항적 사용의 예를 제시하기 위해 고다르의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두세 가지 것들>에서 전통적인 색채조화론에 위배되는 영화색채를 분절화하는 방식을 시도하였다. 영화색채의 '쪼개진 조각들'이 절합되어 의미를 발생시키는 과정을 통해 그는 영화색채의 자율적 요소로서의 독자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윌슨은 크리스테바가 지오토의 회화에서 사용된 색채의 의미화 과정, 즉 외적 대상으로서의 객관적인 것과 본능적인 것으로의 주관적인 것, 그리고 문화적인 것의 각 단계가 동시적으로 관여하는 의미화 과정을 전제로 키에슬롭스키(Krzysztof Kieslowski) 의 <세 가지 색:블루(Trois Couleurs:Bleu)>(1993)의 영화색채를 분석한 바 있다. 따라서 브래니건이 시도한 색채의 분절화와 크리스테바가 바라본 색채의 객관적이며 주관적이고 중요하게는 문화적 현상이라는 전제는 영화색채의 독자적 가치와 그 의미의 실천 과정을 살펴보기 위한 방법적 토대이다. 또한 이를 토대로 한 몇 편의 한국영화 분석과 수용자 중심의 현장분석이다. 수용자 분석은 문화현상으로서의 색채와 영화색채에 대한 수용 태도 및 생산 과정을 참조하기 위한 것이며, 텍스트 분석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이다. 나아가 기존의 텍스트를 위한 텍스트 분석에 따른 해석의 한계에서 영화색채의 창의적이고 살아 있는 의미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잠재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특정한 재현형식들은 상황과 특정한 역사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식에 따라 진보적인 것으로 재약호화될 수 있다. 구조주의적 시각은 할리우드의 서사 리얼리즘을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규정하거나 그러한 리얼리즘이 갖는 관습성을 거부하는 실험 형식을 진보적인 텍스트로 이원화한다. 이것은 영화의 재현 전략이 사회 상황에 따라 상이한 효과를 보인다는 것을 간과한 비역사적 태도다. 영화형식은 상이한 컨텍스트에서는 상이하게 기능한다. 이 연구가 취하는 하나의 글쓰기 태도이며 경계의 자세다.
이 연구의 구성으로 5장과 6장에서의 주요 논의는 영화색채의 문화적 의미화다. 색채의 재현이 갖는 의미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상징, 비유, 알레고리로서의 개념으로 파악될 수도 있으며, 개별적이고 산발적으로는 자연과 심리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색채 자체의 오랜 전통적 의미보다는 그것이 다른 것들과 맺는 맥락에 따른 의미의 실천이 중요하다. 해석은 항상 상이한 상황에서 상이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한국사회에서 문화 내의 국지적이고 산재된 의미 요소로서의 색채가 재현하는 현상적 함의 관계를 살필 것이다. 그 내용은 정치 이데올로기적일 수밖에 없는 복잡한 문화현상과 색채와의 내외적 관계를 분석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구체적으로 색채의 문화정치적인 텍스트의 의미를 보기 위해 국내의 몇몇 영화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선정하여 색채의 의미 맥락을 들여다보고, 나아가 문화현상의 텍스트 분석이 가질 수 있는 의미의 한계에 머무르지 않고 보다 중층적이고 복잡한 그물망의 지점들을 다양하게 고려하려는 의도에서 실제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색채의 수용과 생산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할 것이다. 덧붙여, 테크노피아의 신화로서 디지털 영화의 색채를 분석한다. 디지털의 사회 문화적 의미를 짚어보고, 디지털 색채가 재현하는 공간 이미지의 특성을 제시한다.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은 영화 텍스트로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한국영화 <노랑머리>(김유민, 1999)와 <비트>(김성수, 1997)를 선정하였다. 첫째, 한국영화로 한정한 이유는 거의 모든 논의가 그렇듯이 궁극적으로 한국영화의 정체성 확립에 기여하고자 하는 바람에서다. 현장에서든 이론적으로든 한국영화에 대한 시각을 보다 풍요롭고 창조적으로 확대하려는 의도다. 둘째, 필름을 직접 봐야 한다는 영화색채 재현의 기술적 특수성에 따라 현재 접근 가능한 영화에 한정하였다. 셋째, <노랑머리>를 선택한 이유는 계급투쟁의 성향이 강했던 과거에 비해 현대사회에서 의미투쟁의 성격으로 전환된 상황에서 결국 대중영화 내에서 대안 및 해체적 시도를 추구하고 찾아내야 한다는 논의를 따를 때, <노랑머리>는 그러한 독해 가능성을 갖는 텍스트다. 또한 컨텍스트 차원에서 <노랑머리>는 사회적 갈등 양상을 독해할 수 있는 것으로 확장된다. 넷째, <비트>를 선정한 이유는 영화색채의 활용 비율이 비교적 높다는 것이다. 특히 주조를 이루는 파랑은 주류 영화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사용과 다르게 쓰였다는 것에 주목하였다. 일례로 파랑은 주로 새벽이나 이른 아침의 시간 배경을 설명하는 장치로 기능하였으나,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시간의 연속성에 구애받지 않고 쓰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용은 현대사회의 소비욕망과 함께 계급 간 혹은 세대 간 피지배적 위치에 있는 상처받은 주체를 알레고리적으로 의미화하였다는 것이다. 특정한 색의 영화색채가 갖는 문화정치적 의미를 구체화하는 데 적절한 텍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