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도를 웃도는 날에도 수험생으로서 책상 앞에 앉아 모든 자유를 내년으로 미루고 열아홉의 마지막 여름의 긴 터널을 지나 왔다. 지금껏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일상의 안락함에 젖어서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별 어려움 없이 생활해 왔다. 걱정 없이 공부만 하면 될 것을 왜 못해내느냐는 엄마의 푸념을 들을 때마다 스트레스 받는다며 도리어 엄마에게 화를 내기 일쑤였던 내게 비친 여울이네가 겪는 일이 낯설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사춘기 특유의 집단적 행동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중학교 시절에 비하면 여울이 모습은 참혹함으로 얼룩졌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나이트클럽 댄서 사이에서 태어난 여울이는 완벽한 가출을 위해 지침서까지 만들고 힘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온전치 않은 콩가루 집안인 여울이네 가족은 배 다른 3남매와 여든이 넘은 할머니, 백수 삼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든이 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손자 셋을 키우고 고된 집안일을 해야만 하는 할머니는 입에 욕을 달고 살면서 남이 해 주는 밥을 먹으며 여생을 보내는 게 소원일 정도로 안타깝다. 채권 일을 하는 불곰 아빠는 성질이 포악한데다 충동적이라 자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다. 전문대에 다니는 오빠는 다발경화증을 앓고 있어 20살이 넘은 나이에도 늘 기저귀를 차고 다니는 운명 속에 갇혀 있다. 한방을 쓰는 고3 수험생인 이복 언니는 동생에게 욕설을 늘어놓았고, 틈만 나면 시비를 걸어 여울이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주식으로 모든 것을 다 날리고 뇌경색까지 앓아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러 집으로 들어 온 삼촌은 잘나가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생활 자체가 힘든 상황에 놓였다.

갖가지 재료를 적절히 배합하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레시피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번질 때가 있다. 하지만 <<불량가족 레시피>>에 나오는 가족 구성원들은 어느 누구 하나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는 여울이네 가족은 살얼음판을 딛는 것처럼 보인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아빠의 채권 리스트 작성을 도우며 위태롭게 살아가던 여울이는 잠깐이라도 코스튬플레이 카페 활동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잠깐이라도 피오나 공주로 살고 싶었던 여울이는 세바스찬을 짝사랑함으로써 그의 반응에 들뜬 마음으로 지내며 행복감에 젖기도 했다.

카페에서 만난 친구의 도움으로 세바스찬과 친해진 여울이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친구에게 기울어진지 오래였다는 말에 깊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답답함을 해소하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코스튬플레이 활동에서조차 어떤 희망을 기대할 수 없었던 여울이 모습에 가슴이 저려 온다.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잇던 여울이네 가족이 하나 둘 가정을 떠나가면서 가족은 붕괴될 위기에 이르렀다. 아빠의 일을 돕던 수험생 언니가 무임금 노동과 공부를 병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제일 먼저 집을 나갔고, 그 다음으로 삼촌과 오빠가 잇따라 집을 나가면서 집안 분위기는 더욱 음산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연이은 아빠의 구속으로 집까지 차압당하게 되자 여울이는 자신의 출가 계획을 수정하여 집 나간 식구들이 집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게 되었다.

심하게 기울어져 제대로 달릴 수도 없는 낡은 자전거 한 대를 손에 넣고는 바퀴를 손질하고 체인에 끼인 먼지를 닦아 내 거리를 내달리며 상쾌함에 젖었던 추억이 생각난다.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살아갈 날을 막연히 기다리는 여울이와 할머니를 보면서 어딘가에 숨어 있을 희망이 떠오른다. 여울이네 가족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시간 속에 미처 표현하지 못하며 지냈던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정을 두텁게 하는 레시피로 유대감을 더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