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잔인한 게임. 『습도 8페이지』

 

‘안 팔리는 소설가’란 수식어가 소설가에게 어떤 의미일까. 읽고 싶은 소설을 선택해서 읽고, 재미있다 재미 여부를 말하는 입장인, 독자인 나는 그게 소설가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독자에게 읽히기 위함이란 생각이다. 그러니 소설가의 입장에서 읽히지 못하는 소설을 계속 써야 하는지 고민에 빠질 것 같다. 소설을 쓰고 싶어서 소설을 썼으나 읽어주는 이 없는 소설은, 더는 쓸 수 없는 이유를 만들기도 하는 듯해서 안타깝다. 보통 이런 경우를 슬럼프라 부르겠지.

 

반시연의 소설 『습도 8페이지』는 안 팔리는 소설가이자 슬럼프에 빠진 소설가 ‘견지’가 위험한 게임에 빠져들면서 어떤 변화를 하는지 보여준다. 갑자기 돈이 필요해진 견지는 우연히 만난 노이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100일 동안 이야기를 쓴다. 정해진 주제는 없다. 소설은 정해진 30분 동안만 쓸 수 있으며 그 이후 주어진 10분 동안 블로그에 올린다. 이 게임의 제안자는 그 후 소설을 읽는다. 제공된 방에서 집필한다. 절대 불을 켤 수도, 커튼을 젖힐 수도, 창문을 열 수도 없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인터넷도, TV도 켤 수 없다. 100일 동안 이 규칙을 잘 지켜내면 1억을 받을 수 있다.

 

어땠을까? 소설가에게 소설을 쓰라는 이 게임은 어려운 일이었을까? 아니면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쉬운 일이었을까.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조건이 있을 듯하다. 그건 견지에게 제공된 것처럼 장소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발상, 즉 소재의 문제가 우선이 아닐까 싶다. 백지의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밑그림을 그리고 좀 더 세세하게 그려 넣고 색칠을 하는 과정을 거치면 완성된 그림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소설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소재는 이야기의 시발점과 같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소설가는 글을 잘 쓰는 재주는 차치하고, 경험이 많을수록 다양하고 기발한 소재로 재밌는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거 아닐까.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공감하려 애쓰는 게 소설을 쓰기 위한 기본 준비운동 같은 생각이 든다.

 

솔직히 견지에게 이 게임은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일상처럼 하던 일이 소설 쓰는 일 아니었겠나. 원고지 8매 분량이 많아 보이지도 않는다. 가능할 거라, 나는 견지가 쉽게 이 게임을 이길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의, 견지의 착각이었다. 이 게임은 소설을 쓴다는 것에 여러 가지 규칙이 있었던 거다. 일반적인 소설 쓰기와 방식부터, 시간, 환경이 달랐던 거다. 감금된 거나 다름없는 닫힌 공간에서, 불빛이라곤 오직 모니터에서 비추는 빛만이 존재하는 방은 견지에게 최악의 환경이었던 거다. 견지에게 뿐만 아니라 소설가가 아닌 일반적인 사람도 정상적인 정신으로 지낼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게다가 창작의 고통을 몇 배로 겪고 있지 않았을까. 소재의 고갈로 머릿속은 터질 것 같고, 정해진 시간만 글을 작성할 수 있다는 것 역시 결코 쉬운 규칙이 아니었던 거다. 돈이 필요했고, 1억이란 돈을 가질 수 있다는 유혹에 덤빈 게임에서 견지는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견지가 있던 환경을 저절로 떠올리게 된다. ‘나라면?’ 하는 상상도 해본다. 견딜 수 있을까.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로 고개가 가로 저어진다. 암흑의 폐쇄공간에서 눈을 뜰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을 것만 같다. 그런 느낌은 견지가 매일 쓰는 원고지 8매의 소설에서도 느낄 수 있다.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 며칠에 걸쳐 완성되는 이야기도 있다. 계속 이어지는 단편소설인 거다. 그런데 그 단편들의 분위기가 암울하다. 살인과 광기가 출렁인다. 다양한 스토리와 주인공들이 이야기 안에서 춤추듯 넘실거린다. 이야기를 보는 재미와 매력이 넘친다. 그런데 하나같이 잔인하고 절망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사고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싶은 잔인함들, 예상하기 어려운 결말들까지 선뜻 먼저 만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만히 살펴보면 그건 견지가 처한 환경이 만들어낸 심리와 통한다. 사람이 극한에 몰리니 사고는 부정적이고, 생각은 잔인해진다. 많은 것을 절망으로 몰아넣기 쉽다. 1분 후의 모습에 긍정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 거다. 그러니 저절로 이야기는 어둠 속으로 흘러간다.

 

느리게 턱을 움직였다.

비정상적. 예상 밖.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나는 슬럼프였다. 누구도 나의 소설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져서 침울한 나날을 보냈다. 이 방에 들어올 때 나는 무언가를 쓰고 싶은 욕구를 느꼈고, 한때는 철저하게 농락당했다는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지금은, 슬럼프를 벗어나 오히려 예전보다 더 발상을 유연하게 주무르고 있었다. 이 방에 들어와서 말이다. 그것은 확실히, ‘누군가가 나의 소설을 기다려 준다.’ 는 사실이 가져다준 작용이었다. (285페이지)

 

그래서 이 이야기는 어둡기만 한 걸까? 견지가 자신이 쓰는 소설에서 보이는 잔인함만큼이나 육체적인 변화가 섬뜩하다.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 사는 시간 동안, 폐쇄된 공간에서 다른 쪽으로 온 신경을 기울이는 동안 돌보지 않은 몸이 망가지는 건 당연하다. 나태해지고 늘어지고, 무기력해지는 삶. 그런 삶이 가져온 몸의 변화가 잔인하리만치 혐오스럽다. 자기 자신을 돌보고 긴장하는, 흔히 자기관리라고 말하는 의미가 견지의 몸으로 보인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소설, 강요받은 레이스처럼 달리기만 하는, 어떤 강박 같은 게 그를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 같았다. 저자는 여기서 인간의 성향과 삶의 모습이 어떤 영향으로 변화되는지 보여주려 애쓰는 듯하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소설이 누군가 읽어주는 소설로 될 때 소설가는, 인간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준 거다. 소설의 색깔이 달라지고, 몸이 달라지고, 절망이 희망의 의미로 바뀌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걸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또 다른 소설(견지가 만드는 이야기)을 통해 확인시켜 준다.

 

처음에는 어마 무시한 규칙 안에서 견지가 성공할까 실패할까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는데, 소설이 흐를수록 내가 이 소설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소설은, 소설의 옷을 입고, 게임이라는 도구를 내세워, 규칙이라는 환경을 만들어 인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견지의 변화가 그걸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견지의 모습에서 우리를, 인간을 본다. 누구라도 견지의 모습과 닮아가지 않았을까...

 

한여름의 꿉꿉한 습도를 매일 8페이지씩 밀어내며 조금은 건조하고 서늘한 계절을 맞이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뭔가 축축한 것이 말라가는 기분, 상당히 개운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