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펜을 알아보는 중인데 기대하는 것만큼 인식률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도 가격은 싼 게 비지떡일 것 같은 몇 천원부터 너무 부담스러운 몇 만원까지 다양하니 괜히 잘못 샀다 후회할까봐 선택이 망설여진다. 동네 문방구에서 팔면 모를까 택배비도 아깝고... 결국 직접 만들어 쓰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검색해 봤더니 DIY 터치펜에 대한 결과가 꽤 많이 나왔다.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더 정확하게 인식된다는 말에 솔깃해져서 여러가지 방법을 비교해가며 작동 원리를 배울 수 있었다.

 

돈이 아까우면 손가락을 잘라서 쓰라는 어마무시한 지식iN 답글도 있었지만 그럴바엔 차라리 간식용 소시지를 이용하는 방법이 나을 것 같다. 소시지나 알루미늄 캔 등을 테스트해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실험하는 동영상도 있어서 수고를 덜었다. 역시 남들의 시행착오를 알아두는 것은 헛된 노력을 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물에 적신 면봉이나 휴지를 호일로 감싸는 방법은 전자 기기에 안 좋을 것 같고, 폐 건전지에 호일을 감는 것도 액정 표면에 안 좋을 것 같아서 다 쓴 형광펜에 커피믹스 포장지를 씌우는 방법을 따라해 봤는데 손재주가 없어서 그런지 너저분한데다 선이 뚝뚝 끊기기까지 했다. 역시 아무나 다 되는 건 아니다. 하드디스크 포장지나 과자봉지를 이용한 방법이 그나마 나을 것 같긴 한데 재료를 좀 더 연구해야 할 것 같아서 지금은 쓸만한 물건이 어디 없나 집안을 뒤지면서 멀쩡한 볼펜, 싸인펜 따위를 죄다 해체하며 구상 중이다. 그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최고급 터치펜을 사고도 남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인식률을 높이고 싶다는 개선 욕구가 한동안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조상들에게 그런 욕구가 없었다면 지금의 편리함은 아마 누리지 못했을 것 같다. 불편하긴 해도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시간과 비용과 힘을 들여 멀리 돌아가면 비슷한 결과를 낼 수 있지만, 사람들은 불편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결함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 나섰다.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에 나오는 수많은 인공물들 역시 처음부터 지금의 형태는 아니었다. 전에는 불편해서 어떻게 사용했을까 싶은 원시적인 모습이었던 때가 있었지만, 하루 아침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진화한 것이다. 생명체의 종류보다 몇 배 더 많은 특허 등록 건수만 봐도 알 수 있다. 필요한 기능은 추가하고, 불필요한 기능은 제거하면서 지금은 오랜 세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클래식이라 불리는 형태에 도달했지만 그마저도 완전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애초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인공물이란 존재할 수 없으니까.

서로 독립적으로 진화해왔을 먼 옛날의 동양과 서양에도 여성들의 치마나 숟가락처럼 인류 공통의 인공물이 나왔다는 건 필연적인 것 같지만(스코트랜드의 치마 입는 남자들은...), 포크와 젓가락의 갈림길을 보면 문제가 꼭 한 가지 방법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맨손으로 식사하는 사람을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만, 옛날엔 포크를 사용하는 사람이 경멸 당하기도 했단다. 14세기 이전까지는 포크가 제 역할을 못했지만 새로운 유행이 되면서 시행착오와 보완 작업이 이루어졌다. 음식이 손에 묻지 않도록 하려면 이쑤시개처럼 원시적인 도구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빙빙 돌지 않게 두 갈퀴로, 떠먹을 수 있게 세 갈퀴로 점점 늘어났다가 가장 적합한 네 갈퀴로 정착했을 것이다. 앞뒤 없이 편평한 형태에서 곡선을 갖게 되면서 떠먹는 기능이 보완됐고, 토마토 용과 오이 용 포크가 따로 존재하던 시대도 있었지만 절충되고 간추려지면서 실패를 통해 지금의 형태가 되지 않았을까.

음식 의 보존 기능에만 집중한 나머지 꺼내는 방법을 신경 못써 총을 쏴서 개봉하기도 했던 초기의 통조림은 따개라는 또 다른 인공물을 필요로 했다. 바늘이 골무를 필요로 했듯이 인공물은 그렇게 다른 인공물에 기여한다. 일회용 음료 캔의 따개 고리가 여기저기 버려져서 문제가 되자 분리되지 않고 안으로 접히도록 기능이 추가됐다. 기존 물건에서 잘못된 점을 찾아내고, 다양한 문제가 새로운 아이디어의 원천이 된 셈이다. 개선이란 선행기술의 결함을 보완하는 작업이다. 비록 그것이 자기 자신의 아이디어를 스스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더라도 이전 제품에 결함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 없다. 접착력이 약해 쓸모없던 접착제를 활용해 포스트잇을 만든 것처럼 지금 우리가 유용하게 쓰고 있는 물건들은 그렇게 실패를 통해 진화해왔다.

 

포스트잇 노트는 기존 인공물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실패를 깨달아 그것들이 헛되지 않도록 기술적으로 발전시켜 새로운 인공물을 만들어낸 사례이다.(151쪽)

사람들은 보통 완벽하지 않은 인공물을 복잡하게 개선하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사용 방식을 바꿔 상황에 적절하게 적용하려고 하며, 또 그런 능력이 있다. 반면에 발명가들은 인공물의 결점을 개선하는 방법을 찾는 데 집중함으로써, 적어도 결함을 없애는 시도를 할 때는 쓰임새가 더 복잡해지는 것조차 서슴지 않았다.(335쪽)

사람들에겐 도구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때까지는 훨씬 불편한 것인데도 오히려 편리하다고 느끼며 이전 방식을 고집한다. 이런 전통의 문제는 기능의 변화에 따라 형태와 방식이 달라져야함에도 계속 흔적을 남긴다. 여자 옷의 단추 위치가 남자와 다른 이유는 다른 사람이 옷 입는 것을 도와야 했기 때문이었는데 요즘 시대에는 맞지 않지만 여전히 그쪽에 달려 있고, 플라스틱 시대에 와인의 유리병과 코르크 마개는 낭비이지만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이유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들쑥날쑥한 핀의 품질을 확인하기 위해 카드에 꽂아서 판매하던 포장방식은 기계화로 품질이 균일화되고 포장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생산량을 따라잡지 못하는데도 고집되고 있다. 심지어 오토바이 연료탱크는 기능상 위치가 바뀌었는데도 가짜 탱크를 달아놨을 정도로 디자인의 영향력은 뿌리 깊다.

이 책은 디자인의 미적인 요소를 말하지 않는다. 포크, 페트병, 클립, 스카치 테이프와 포스트잇, 지퍼, 톱과 망치, 캔, 햄버거 포장지 등 기능적, 사회적 요인에 따라 디자인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처럼 공학적인 요소는 뒷전인 채 외관만 중시했다가 공사기간은 9년이나 지연되고, 예산은 1400%나 들어간 나쁜 사례를 통해 기능에 대한 고려 없이 선택된 디자인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신중한 선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남의 디자인을 도용하는 사람들이 같은 기능을 발휘하려면 그 디자인 밖에 방법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표절이 장르의 유사성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저자는 얼마든지 다른 문제해결 방식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저자가 전화기 사용법을 익히는 데 애를 먹고 있다길래 스마트폰 얘기인가 했더니 다이얼식에서 버튼식으로 바뀌었다는 소리였다. 카피라이트를 확인하니 LG가 골드스타라고 불리던 1992년에 출간된 책이다. 그렇다고 22년 전이라는 출간 연도가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마지막장을 읽을 때까지 그 사실을 알 수 없었을 정도로 이 책의 지식은 완성형에 가깝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는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디자인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겠기에 감안하고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짚고 넘어간다. 디자인에 관한 클래식 도서로서 만나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