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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의 썸머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영화가 몇 개 있다. '500일의 썸머'도 그 중 하나다. 톰과 썸머 사이의 연애를 그린 영화인데 특이한 점은 헤어진 시점과 만나는 시점을 적절히 교차시켜서 같은 상황이라도 '이때는 이랬는데 저 때는 저렇더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시간이 왔다갔다 하지만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고, 연애에 대한 다른 두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이 영화의 끝에 가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톰과 헤어진 썸머가 우연히 공원에서 만난다. 톰은 썸머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왜 자신이 그 상대가 되지 못했을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썸머는 말한다.

 

Well, you know, I guess it's 'cause I was sitting in a deli and reading Dorian Gray and a guy comes up to me and asks me about it and... now he's my husband.

도리언 그레이를 읽다가 썸머를 만난 어느 남자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 영화를 너무 재미있게 봐서 '도리언 그레이'가 뭐길래 싶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도리언 그레이

 

 

도리언 그레이는 순수 그 자체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선단체에서 봉사하는 내면까지 순수한 영혼이었다. 화가인 바질 홀워드의 모델이 되어주던 도리언 그레이. 바질은 그의 외모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았고 그 감명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에 쏟아부어 걸작을 만들어낸다. 그 초상화를 본 바질, 헨리, 도리언 모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도리언의 그 수려한 외모를 너무나도 잘 표현해서.

이런 도리언 그레이에게 쾌락을 알려준 것은 초상화를 그리던 중 만난 헨리 워튼 경이었다. 헨리 워튼 경은 뱀의 혀를 가진 쾌락주의자였다. 그는 도리언 그레이에게 접근을 하고, 그에게 영원한 즐거움을 취하는 길은 쾌락뿐이라고 설파한다. (p.36-37, 111-112) 그리고 그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면서 젊음 없이는 아무것도 즐거울 것이 없을 거라고 그에게 말한다.

 

진짜로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 된 것만 같았다. 아니면 그런 선택은 이미 끝난 것인가? 그렇다. 인생은 이미 그를 위해, 그의 인생과 삶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을 위해 이미 결정한 것이었다. 영원한 젊음과 무한한 열정, 은밀한 쾌락, 미칠 듯한 기쁨과 거칠 것 없는 죄악, 이 모든 것을 소유할 것이다. 그의 치욕스러운 모든 것들은 초상화가 모두 가져갈 것이다. 이것이 선택이었다. p.147

그의 그런 말들을 들으며 도리언 그레이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그가 초상화의 젊음과 자신의 모습이 뒤바뀌어, 초상화가 자기 대신 늙기를 바라면서 도리언의 타락은 시작된다. 자신이 순수하게 사랑했던 연인인 시빌 베인이 자신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에 자살하자 그는 그녀의 자살을 아름다운 비극으로 포장하여 받아들인다. 초상화는 도리언의 바람을 들었는지 조금 흉측한 미소를 띠게 변해있었다. 그 이후로 도리언의 타락은 끝을 모르고 달려간다.

 

 

 

 

 

벨 아미

 

 

도리언 그레이를 읽으며 '벨 아미'가 생각났다. 둘의 공통점은 수려한 외모일 것이다. 여자의 마음을 단번에 흔들고 첫 만남에서 호감을 주기 쉬운 수려한 외모. 하지만 두 이야기는 그 외모를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조르주(=벨 아미)는 그 외모를 활용할 줄 아는 남자였다. 조르주는 자신의 외모를 활용해서 정부를 만들고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도리언 그레이는 백지 같은 사람이었다. 헨리 워튼은 그에게 배움이란 아무 쓸모가 없으며, 쾌락에 방해만 되는 존재라고 말한다. 도리언 그레이는 그를 강력하게 비판할 지식이 없었던 것 같다. 너무 순수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헨리의 감언이설에 점점 넘어가기 시작했고, 그 누구보다 자신의 외모를 이용하여 남에게 믿음을 준 후 타락하기 시작했다. 순수했던 이상은 잃어버린 채.

어쩌면 도리언 그레이와 벨 아미 모두 타락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벨 아미는 세속에 젖어서 인정을 무시하고 권력의 꼭대기로 가는 폭주 기관차를 탄 셈이고, 도리언 그레이 또한 남을 불행에 빠뜨리며, 살인, 아편과 같은 것을 했으니까. 하지만 벨 아미가 더 긍정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는 자신의 신념이 있었고, 거기에 따라서 움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도리언 그레이는 순수했으나 타인에 의해 자신의 주관이 쉽게 흔들렸고, 자신이 스스로 타락한 존재임을 인정해버린다.

신념과 가치관의 차이인 것 같다. 악당이라도 자신의 신념이 있으면 이해할 만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저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에 불과할 것이다.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을 세운다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행복한 왕자

 

 

이 책을 쓴 오스카 와일드에게는 또 다른 유명한 책이 있다. 바로 행복한 왕자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봤을 이야기이다. 거리의 한복판에 서 있는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왕자 동상이 자신의 몸을 희생해가며 불쌍한 이를 돕는 동화 말이다. 이런 책을 쓴 그가 단 한 편의 장편소설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는 이토록 잔인하게 인물을 그려낸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아름다운 동화를 쓰는 동시에 유미주의의 대표주자.

 

 

 

 

 

다시 돌아와서 500일의 썸머

 

 

썸머는 왜 하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다가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인지 생각해보면 영화를 더 흥미롭게 볼 수 있을 듯하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헨리 워튼 경은 사랑 따위는 쾌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을 한다. 썸머 또한 그랬다. 톰에게 진정한 사랑은 없다고, 우리는 지금의 관계로 좋은 게 아니냐고 하면서. 도리언과 비슷하지 않은가? 썸머는 도리언 그레이를 읽으면서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을 만나면서 뭔가 달라진 게 아닐까?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쾌락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지 않은가? 아름다움, 사랑 또한 그런 것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우리는 새로운 자각을 위해 썸머처럼 새로운 경험을 해봐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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