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인생독본>이라고 포털 책db에 검색하면 10여 종 이상이 나올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문호라기보다 거의 종교적 성인(聖人)에 가까운 삶을 산 분이라서, 그가 남긴 잠언은 마치 기독교 성경 구절만큼이나 독자에게 강한 울림과 감동을 선사합니다. <톨스토이 인생독본>은 거의 일제시대 무렵의 관제화한 독서 풍토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갑니다.

책만드는집 출판사에서 낸 고전들은, 현대의 독자들이 쉽게 접하고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는 세련된 편집이 돋보이더군요. 저는 <다시 읽고 싶은 한국 베스트 단편 소설>, <주홍 글자>를 읽어 봤습니다. 잘 아는 고전도 현대적이고 정확한 문장으로 다듬고, 역주까지 충실히 달려 있으면 독자로선 참 편한데, 그런 니즈를 잘 만족시켜 주는 것 같았습니다. 받아 보니 판형도 작아서 휴대하기 편하고, 생각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더군요.

톨스토이가 남긴 잠언들은 심오하고 진솔한 인생의 지혜를 고스란히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표현이 아름다워서 마치 성경 구절의 품격과 도덕적 무게를 가진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소중한 경구를, 그 깊은 의미와 잘 어울리는 산뜻한 배경 이미지와 함께 접한다면, 그 감동이 몇 배 더해지고 기억도 오래 지속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이더라구요.

삶은 영원히 지속된다(p159). 영어에서 Life goes on.이라는 말을 쓰긴 합니다. "산 사람은 ？맘틴？ 한다." 같은 의미로 바뀔 때도 있고, 우스개로도 의미가 전용되기도 합니다. 톨스토이는 이 말의 뜻을, 마치 동양의 윤회론을 연상하게 하는 의미로 새기며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죽음이란 그저 이 세상에 한정된 체험이자 사건이며, 생명 자체는 이 생에서의 효용과 수명을 마치고 다른 형태로 전환되어, 영원 불멸로 지속된다는 거죠. 그런데 이런 세계관이, 크리스트교에서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원죄설, 구원론, 종말설과는 어떻게 조화될지 의문이 생기기도 하더군요.

p69에 보면 아주 강렬한 명제가 독자의 가슴을 칩니다. "인간은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누군가가 불행하다면, 그것은 어느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의 잘못이다. " 정말 그렇습니다. 마치 노희경의 말,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같은 준엄한 선고처럼 다가오는걸요? 행복도 마치 사랑처럼, 옵션이 아니라 필수였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비단 "행복"이라는 과제에만 해당하지 않고, 인생사 모든 목적과 과정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남 탓을 하는 사람은 바로 그것만으로 유책(有責)한 죄인입니다. 영화 <빠삐용>에도, "내 죄가 무엇이냐?"며 항변하는 주인공에게, 저 깊은 양심 속에서 어느 목소리가 대답합니다. " 네 자신의 인생을 낭비한 죄도다." 인간은 신 앞에 서기 전에, 이미 자신의 영혼 앞에 죄를 짓고 살기 십상이죠. 이 묵직한 가르침을, 책은 은은한 촛불 사진을 배경으로 우리에게 나긋이 내밀고 있습니다.

p41에 보면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부언하기를, "특히 그 사람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고 남들이 하는 말에만 의존할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고 합니다. 우리 동아시아권에서는 사실 소문을 잘 내는 것도 권력 다툼의 한 기술인지라, 구설수에 오르는 건 각 개인이 현명하게, 능력껏 피해야 할 뿐이지 도덕의 영역으로까지 강조되지는 않죠. 만약 톨스토이 같은 분이 우리 한국에 태어났더라면(저 경북 안동 쯤의 양반 가문으로), 아마 혹독한 뒷담화 문화에 적응 못 하고 더 일찍 세상을 뜨셨을지도 모릅니다. 뒷담화도 환경에 따라서는 정글의 법칙 중 한 조항일 수 있으므로, 도덕에 의지하기보다는 개인이 알아서 처결해야 한다는 게(법정으로 끌고 가든지), 더 현실감 있는 충고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 참, 신약성서에 예수의 말씀으로 그런 게 있기는 하죠. "너희는 재판관이 아니니 남을 판단하지 말라." 그런데 무릇 범속한 사람들은 판관이 되는 재미에 세상을 삽니다.  결국은 강 대 강, 실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p213에 보면 리히텐베르크의 말을 빌려, 평등이란 결코 해결하지 못 할 과제가 아니라고 일러 줍니다. 세상에 태어난 이들이, 능력이나 외모, 재력 등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른 처지이니, 유리한 위치에 오른 이를 억지로 누르지 않고서야 평등이 달성되기 요원하다는 거죠. 그냥 생긴 대로 살게 내버려두라는 게 이른바 "신자유주의"이기도 하고요. 어느 것이 완전히 옳거나 그르다고는 할 수 없죠. 이런 말을 톨스토이가 굳이 남긴 것은, 당시 그가 살던 시대가 이른바 사회적 진화론, 약육강식의 논리가 철저히 지배하던 세상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p212에는 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해지는 초원에서, 양 두 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선이 되지 못하면, 그것은 바로 악을 눈뜨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p58). 결국 선을 행하고 자신의 영혼에 동화하는 것도 칸트적 의미에서의 의무라는 거죠. 이런 선을 실천하는 방법론, 혹은 등가체라면 "사랑"이 있겠는데, 이 사랑 역시 자신이좋아하는 것만 사랑하는 방식은 곤란하며, 차별 없는 박애에 가까운 것이라야 한다는군요. "사랑"은 "노력"을 통해 완전해진다고 하니, 동양적인 인(仁)과도 통하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