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바람 한 칸 쉬어갈 빈 자리를 
-고두현의 [옛시 읽는 CEO]를 읽고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시를 읽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 고매한 인격을 갖춘 인간이 된 듯 착각에 빠져들 때가 있다. 시는 절제된 감흥과 여백의 미를 함축하고 있어 일상에서 경험하기 힘든 특별한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세계와 마주하는 순간, 빈곤한 정신이 풍성하게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그 깨달음을 통해 마음에 단비라도 촉촉이 내려주어야 할 것 같은데, ‘바쁘다 바빠’를 연발하며 사는 나로서는 잠시라도 가만히 앉아 시를 읽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적어도 물리적 시간과 정신적 여유가 합집합은 아니더라도 교집합 정도는 이루어줘야만 몰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물며 옛시는 어떠한가? 한자 세대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고 해도 더듬더듬 읽어내기조차 힘든 시구에서 그 뜻을 헤아릴 리는 만무하다. 옛시는 따로 해설이 곁들여지지 않으면 도저히 읽어 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유리 벽 안에 고이 모셔진 경전과 다름없다.

마음에 감동이 차고 넘치는 순간

독서는 그 자체가 즐거운 지적 경험이 된다. 앞으로 읽을 페이지가 지금껏 읽은 페이지보다 줄어들 때 맛보게 되는 짜릿한 성취감! 이것은 독서의 묘미 중 하나다. 허나, 읽어야할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마음이 조급해지는 책이 있다. 다음 장으로 넘기기가 아쉬워지는 책, 마음에 감동이 차고 넘쳐서 오래두고 느리게 읽고 싶은 책, 바로 고두현의 [옛시 읽는 CEO]처럼 말이다.
여는 시를 읽는 순간 마음이 탁, 풀려버린다. ‘되었다. 이 정도면 이 책은 되었다’라는 생각이 들만큼 좋은 느낌이 든다. 긴장이 풀리면서 마음을 백지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긴장감도, 허점을 찾고자하는 날 선 비판도 모두 거둬들이고, 오로지 한 구절 한 구절 마음에 아로 새기고 싶은 욕심이 생겨난다.

저자 고두현은 ‘옛시는 어렵지 않을까’라는 편견을 보기 좋게 무너뜨려 주었다. 우리말로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한시는 그 자체로 완벽한 시가 되어 독자의 마음속 깊이까지 가닿을 준비를 마친 상태다. 더불어 한시 원문과 책 말미에 독음까지 첨부해 그 원형을 이해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수험생이던 시절, 옛시는 외우기에도 버거운 시험 문항 중 하나였다. 이미 규격화된 듯 정해진 뜻풀이로만 이해했으니 시가 주는 감흥에 제대로 마음 한 번 열어볼 기회가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 후 우연히라도 접하기 힘들었던 옛시를 [옛시 읽는 CEO]를 통해 32수나 만나게 되었다. 지금 읽어봐도 마음에 파고들지 않는 구절이 없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학창시절에 이 같은 즐거움을 모르고 살았다니. 대한민국 주입식 교육에 내 어린 영혼이 저당 잡힌 기분이 들어 잠시 씁쓸해진다. 어찌되었든 지금에라도 옛시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으니 그 고마움을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으랴.

옛시 읽는 사람의 영혼은 풍요롭다

옛시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CEO를 만나는 기쁨도 쏠쏠하다. 내 마음을 이끈 구절은 상대의 마음에도 가닿기 마련. 그것을 명민한 CEO가 놓칠 리 없다. 민감한 국제 관계에서나 정치 경제적 난국에서 옛시는 부드러운 화해를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옛시를 통해 CEO가 갖추어야할 덕목을 짚어주고, 인생의 지침으로 삼아도 좋은 깨달음을 전해준다. 비단 비즈니스 상황뿐 아니라 개인의 경우에도 새겨봐야 할 부분이 많다. [옛시 읽는 CEO]는 영혼을 채워주는 색다른 자기계발서가 될 것이다.

내 마음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을까. 무엇이 바빠 시 한 구절 읽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살았을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도 시간은 흘러가기 마련. 매사에 충실하면서도 마음에 여유 한 자락 남겨두고 산다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 같다. 백거이의 「술잔을 들며」를 읽노라면 세상사 조급할 게 하나 없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저 하하 웃고 싶어진다.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 부싯돌 번쩍하듯 찰나에 사는 몸 / 풍족하나 부족하나 그대로 즐겁거늘 / 하하 크게 웃지 않으면 그대는 바보 - 백거이,「술잔을 들며」전문

고두현은 역시 시인이다. 그의 시심은 장문의 글도 한 편의 산문시로 재탄생시킬 만큼 깊이가 다르다. [옛시 읽는 CEO]를 읽다보면 옛시가 주는 생경한 감동과 저자의 글맛에 빠져보는 소소한 기쁨이 더해진다. 마치 추운 겨울 언 몸을 녹여주는 온돌방의 뜨듯한 기운이 묻어난다고 할까. 더불어 옛시의 정취를 한껏 살려주는 수묵화 또한 눈길을 끈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윽해지는 진중한 멋스러움이란. 여백과 느림의 미학을 최고조로 끌어올려주는 대목이다.

마음에 바람 한 칸 쉬어갈 자리를 비워 둔 사람은 행복하다. 그 마음에 어디 바람만 왔다 가겠는가. 생각의 여백이 넓을수록 담을 것도 많아지는 법. 이것저것 다 채우고도 빈자리 하나쯤은 남겨둬야 한다. 그 빈자리야 말로 내 영혼을 맑게 가꿔줄 그릇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