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내 나이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지만 뱀띠라 서른 여섯이라고 계산이 자동으로 나와 버렸다. 뭐 우리식으로 굳이 한살을 더하는 수고로움은 피하고 싶다. 차라리 생각을 안하고 살면 괜찮은데 숫자라는 것이 이상한 힘이 있어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게 눈에 띈다. 머리숱은 줄어도 콧털은 무성해지는 이상한 신체 변화를 맞게 되면서 제2의 사춘기라는 불혹 마흔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마흔의 대명사가 된 불혹(不惑). 흔들리지 않는다, 유혹당하지 않는다는 의미처럼 자리잡고 안정할 시기이지만 오히려 더 흔들리는 건 왜일까.

p.281-선발투수가 이제 공 좀 던져 보려고 하는데 감독이 올라와서 공을 뺏는 것처럼, 사십은 이제 시작해서 뭐 좀 잘해 보려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공을 빼앗길 나이이기도 하다.

혹惑은 사람의 마음이 한 갈래가 아니라 두 갈래 이상으로 나뉘었다는 뜻이다. 사람이 두 생각에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이랬다 저랬다 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혹이다.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는 불혹(不惑), 혹하지 아니하리라-혹을 줄여야 한다는 일곱 가지 주제-노화, 술, 탐욕, 쾌락, 몰려 다님, 편견, 권위와 유혹(誘惑), 혹해도 좋지 아니한가-혹을 늘려야 한다는 일곱 가지 주제-초발심, 용기, 진정성, 공감, 의미, 아름다움, 나눔 등 총 열네 가지 이슈에 대해 한 주제마다 세 가지 입장을 소개하고 있다. 각 주제의 마지막은 떠오르는 7080 노래로 정리하는 '노래에 실린 인생, 인생을 실은 노래'라는 코너가 있지만 노래 얘기보다는 노화-<화양연화>, 탐욕-<도둑들> <광해 왕이 된 남자>, 쾌락-<색, 계>, 편견 <죽어도 좋아> <그대를 사랑합니다>, 초발심-<박하사탕> 등에서 예로 든 영화 얘기가 더 많은 것 같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혹해도 좋은 진정성과 아름다움 두 가지 주제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어서 소개해 본다. 어쩌면 진정성이 아름답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p.196-<육조도정도六祖搗精圖>는 홍인이 혜능에게 별다른 가르침을 주지 않고 혜능더러 장작 패고 방아를 찧도록 했는데, 혜능이 몸이 가벼워 방아를 제대로 찧지 못하자 등에 돌을 메고 일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렇게 8개월을 보내자 홍인은 혜능에게 깨달음의 노래를 읊게 하고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그날로 자리를 물려주었다. 혜능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였지만 그것에 짓눌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여덟 달 동안 해냈다. 8개월은 그저 의미 없이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일상에서 깨달음을 찾는 수행이었던 것이다.

요즘 잠이 오지 않아 밤 늦게 케이블에서 방영하는 <고교생 레스토랑>이라는 일본 드라마를 보고 있다. 시골 마을을 살리기 위해 고등학생들이 운영하는 레스토랑 이야기로, 잘나가던 요리사가 모교의 임시 교사로 학생들을 관리한다. 그가 부임 첫날 지시했던 일은 청소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은 학원 가야한다며 왜 그런 일까지 해야 하냐고 항의하고 요리사는 그들을 내쫓는다. 다음날부터는 오이 썰기 연습이 시작된다. 학생들은 요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오이만 써는 일에 불만을 토로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식당을 도와주는 한 학생은 왼손잡이인데 사용하는 손을 오른손으로 바꾸라는 요리사의 지시에 이유는 모르지만 묵묵히 따른다.

예전에 봤던 요리 대회 프로그램이 기억난다. 한복 입은 요리 연구가들 여러명이 심사위원으로 요리를 배운지 얼마 안되는 참가자들이 요리 경연을 벌인 프로그램이었다. 여러가지 메뉴 중 자유 선택해서 요리했었는데 요리 고수인 심사위원들이 보고 하는 말은 한결 같았다. 왜 어려운 음식들만 골랐냐는 거다. 어려운 음식을 제대로 못하는 것보다 쉬운 음식을 기본에 충실하게 하는 걸 더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p.163-사람이 도를 닦으면 오히려 도가 실행되지 않고, 온갖 나쁜 경계가 앞 다투어 일어난다.

별달리 꾸미지 않고 늘 하던 대로 하는 마음이 곧 도이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평소대로 하라는 뜻이다. 늘 해왔던 일상, 평상의 가치를 생각하면 기본에 충실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깨닫게 된다. 아마 나였어도 눈에 띄기 위해 어려운 과제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기본은 너무 쉬워 보이고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만 하다. 어서 화려한 기술을 선보여서 내 재능을 뽐내고 싶다. 하지만 잘 안된다. 포기하고 더 잘할 수 있는 다른 일을 해보자.

p.188-뭔가 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렇게 되도록 해 보라. 술술 풀려 나가지 않는다면 이 정도면 되겠지 단정하거나 결코 그만두지 말라. 다른 사람이 한 번 해서 잘하면 나는 백 번을 하고, 다른 사람이 열 번 해서 잘하면 나는 천 번을 한다. -중용 20장

내 인생을 되돌아 보니 참 철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주위의 충고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주나라 려왕처럼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을 가차 없이 죽였더니 백성들이 길에서 다른 사람과 마주쳐도 눈짓으로만 의사전달을 했다는 오능미방(吾能弭謗) 이야기를 읽으니 내 젊은 시절은 폭군처럼 남의 입을 틀어 막았던 시기였다.

p.142-사람들은 사고방식과 일처리에 있어 자신만의 폐쇄회로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내 식대로 하면 다 잘되게 되어 있는데 다들 왜 내 발목을 잡을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견은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도 듣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다.

후회와 미련처럼 마음 속에 여러 갈래 길이 생기고 있는 시기다. 꿈을 잠시 접어 두는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지만 다시 펼치기에는 점점 기회가 없어질 거라는 사실이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든다. 꿈에 다가가려면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는데 늘 미뤄 두기만 했었다. 기본에 충실하지 못해 금방 재능의 바닥이 드러나 버렸고, 나 자신도 많이 실망했었다. 그 밑바닥을 외면하고 회피하느라 채우는 일에 소홀했다. 어느 길로 나아갈지 헷갈릴 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최선이다. 아직은 조금 더 꿈을 찾아 방황하고 흔들려도 좋지 아니할까?

p.150-'초발심시변성정각初發心時便成正覺'-처음 마음을 일으킬 때가 올바른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