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 어디서 온 뉘신지요?

유비: 한의 좌장군에 의성정후요, 예주목이자 황제의 아저씨뻘 되는 유비가 특히 선생을 뵈러 왔다고 전해라.

시동: 저는 그 많은 직함을 다 욀 것 같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걸 다 전해야 됩니까?

 

(이문열 평역) 삼국지 중 삼고초려 장면의 한 부분인데 정말 무안한 상황이다. 유비는 마치 "내가 누구인 줄 알아?"라며 갑질할 준비라도 하는 듯하고, 시동은 "그런데 어쩌라고?"하며 아니꼬운 모양새다.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누구냐는 질문에는 의례 이런 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만한 마땅한 수식어를 찾는 데 골몰한다. 하지만 방청객의 자기소개처럼 '어디 사는 몇 살의 아무개라고 합니다'라는 멘트로 '나'를 정의하는 건 무리다. 이사 가고, 나이 먹고, 개명하면 '나'는 전혀 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방송에서 보니까 '장인어른, 장모님'이라는 말은 사위가 제삼자에게나 쓰는 표현이지 당사자에게는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들었다. 안 그러면 "시아버님, 시어머님, 식사하세요~"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색하다는 거다. 내 이름이나 직업, 사는 곳 따위 역시 제삼자에게나 쓰는 말이지, 나 자신에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일기장에 굳이 '나는~'이라고 쓰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기 진정한 '나'를 찾는 문제에 부딪힌 뤄링이라는 인물이 있다.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고, 대학 교수 남편까지 둔 남부러울 것 없는 여성이지만 요즘따라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다. 남편과의 사이도 예전같지 않고, 아이를 갖지 못한 탓에 시댁 식구들과도 왠지 불편하기만 하다. 복잡한 감정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까, 우연히 만난 이상한 노인이 외부로부터 얻는 쾌락과 안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의 차이를 알려주자 그에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가르침을 받기로 한다. 처음엔 긍정적인 에너지와 부정적인 에너지 모두 강력한 전파력이 있다는 걸 배운다. 그런 에너지는 유유상종으로 비슷한 기운을 끌어들인다.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나 생각이 알게 모르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잠재의식이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거다. 뤄링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은 우리의 생각에 따라 같은 상황을 얼마나 다르게 받아들이는지를 잘 보여준다. 자신이 승진 대상에서 탈락한 줄 알고 있었던 뤄링은 회사 동료들의 시선에서 동정 혹은 남의 불행에 고소해하는 인상을 받았지만, 알고 보니 자신이 승진하게 되었고 동료들의 반응은 사실과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바뀌면 태도가 달라지고, 태도가 바뀌면 행동이 달라진다. 이 세상에는 하늘이 하는 일, 나의 일, 남의 일이 있다. 그 중에서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일 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게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바꾸려 하고,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에서는 만족하지 못한다. 가끔 좋은 의도라는 핑계로 상대를 바꿔놓으려고 다그칠 때가 있다. 상대가 건강하길 바라서 운동하라고, 성공하길 바라서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이 책임지기 싫어서,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는 게 싫어서일 가능성이 높다. 사랑에서 나온 잔소리가 아니라면 두려움과 책임을 떠넘기는 행동일 뿐이다. 스스로 불안과 자책을 만드는 것도 모자라 타인에게까지 전가시킬 필요는 없다. 반대로 생각하면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 따위에 연연하는 것 역시 나 스스로를 다그치는 일이 된다.

p.159-"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걱정하는 건 사실 아주 무책임한 가학 행위야."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먼저 남을 원망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말했듯이 남의 일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없으니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데, 아래 예시처럼 자신의 생각을 살짝 바꿔 보고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 살펴보는 방법이 있다. 어쩌면 그동안 다른 사람들을 너무 몰아붙였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기적이다. 그는 한 번도 진심으로 내게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다.

=>부정문으로 바꿔 보면:

 그는 이기적이지 않다. 그는 한 번도 진심으로 내게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주어를 '나'로 바꿔 보면:

나는 이기적이다. 나는 한 번도 진심으로 그에게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참된 자아를 감춘 채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만약 그 가면이 피해자 코스프레라면 평생 남을 원망하며 피해의식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감정 시스템은 한 번 고착되면 계속해서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세상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나'라는 역할을 맡았지만, 대다수는 천편일률적인 발연기만 펼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니 남들 하는 대로 따라서 사는 거다. 행복한 역할을 연기하고는 싶은데 돈 많은 사람이 행복해 보이니까 부자가 되려 하고, 힘 있는 사람이 행복해 보이니까 권력자가 되려 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부자는 그저 돈이 많을 뿐이고, 권력자는 그저 큰 힘을 휘두를 수 있을 뿐 직접적으로는 행복과 아무 상관이 없다. 굳이 행복해지기 위해 돈을 모으고, 권력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거다. 그동안 겉모습만 행복하려고 스스로를 몰아붙여 왔다면 이제는 자신을 추스를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