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뇌’가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방식이 있다. 불현듯 떠오르는 나쁜 기억이 그것이다. 물질적 존재인 ‘뇌’는, 뇌 과학자들이 말하듯이 잠시도 쉬지 않고 365일 활동한다. 자면서도 활동하고, 멍하니 있을 때도 활동하고,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기능을 묵묵히 수행한다. 평소에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뇌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나’가 ‘뇌’를 방해할 때다.

<왜 나쁜 기억은 자꾸 생각나는가>는 물질적 존재인 ‘뇌’가 심리적 존재인 ‘나’의 간섭을 받을 때 나쁜 기억이라는 신호를 보낸다고 설명한다.

 

 

이 책의 저자 김재현에게도 악몽처럼 떠오르는 나쁜 기억이 있다. 그녀는 고교평준화를 한 해 앞두고 치러진 전기 고등학교 시험에서 답안지를 밀려 썼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의사가 되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을 해왔던 중학교 3학년의 소녀는 큰 상처를 입었다.

소녀는 밤마다 ‘너는 패배자야.’라는 귓가의 속삭임에 괴로워했다. 두 달 동안 앓아누우면서 몸무게는 38kg으로 줄어들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후기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그날의 기억은 그림자처럼 3년 내내 그녀를 쫓아다녔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도 나쁜 기억은 떨쳐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은 갈수록 선명해지며 그녀를 방황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는 3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재수, 삼수, 그리고 사수를 한 끝에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했다. 6년이라는 시간을 돌고 돌아 초등학교 때부터 꿈꾸었던 의사의 길에 힘겹게 올랐다. 하지만 의사가 된 후에도 나쁜 기억은 간간히 떠올랐다.

 

 

김재현은 의사가 된 이후로 비전 달성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단순한 비전이 아니라 뇌 과학의 입장에서 바라본 비전 달성이 그녀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녀는, 뇌가 지닌 무한한 잠재력이 심리적 요인에 의해 간섭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뇌를 방해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찾던 중, 나쁜 기억과 다시 조우하게 된다. 나쁜 기억은 ‘뇌’가 방해를 받고 있을 때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6년을 방황케 만들고, 이후에도 계속 떠올라 고통을 안겨주었던 나쁜 기억의 정체가 비로소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게 이 책 <왜 나쁜 기억은 자꾸 생각나는가>의 모티브가 되었다.

 

 

뇌가 ‘나’에게 나쁜 기억을 생각나게 하는 이유는 ‘나’가 ‘뇌’를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뇌는 본래 탁월한 학습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데이비드 챔버린 박사는 임상 실험을 통해 태아가 지닌 학습 능력을 증명했으며, EBS 다큐프라임에서는 실험을 통해 갓난아이들이 기초적인 물리 법칙을 선천적으로 알고 태어난다는 내용을 방영했다. 헤엄치는 것이 물고기의 본능이듯이 뇌는 본능적으로 정보를 흡수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말이다. 뇌의 능력은 이뿐이 아니다. 뇌졸중으로 뇌 신경세포의 95%를 잃은 사람이 정상인과 똑같이 회복된 사례가 보고되었으며, 자의적으로 바이털사인을 조절하는 명상 수련자들의 예도 잘 알려져 있다. 1·4 후퇴 당시 길바닥에 버려진 아이가 영하의 추위에도 죽지 않고 기적적으로 생존했다는 기록도 있다.

저자는 숱한 뇌 과학 자료들이 증언하는 이런 자료를 검토하면서 한 가지 의문점을 갖게 되었다. 왜 이런 현상은 보편적으로 발견되지 않고 일부 사람들에 한해서 드러나는 것일까? ‘뇌’가 마음껏 능력을 펼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저자는 이 지점에 이르러서 뇌 과학은 이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 해답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았다. 인문학이었다. 앞선 예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나’가 없다. 엄마 뱃속의 태아나 갓난아이에게는 아직 ‘나’라는 의식이 없고, 명상 수련자들은 수련을 통해 ‘나’를 내려놓는 법을 익힌다. ‘나’라는 생각이 없을 때 ‘뇌’는 뇌 과학에서 말하는 신비로운 뇌, 잠재력을 지닌 뇌의 진면모를 보여준다. 저자는 무릎을 쳤다. ‘뇌’는 ‘나’의 방해를 받고 있구나! ‘무아지경’이란 말의 의미도 새롭게 받아들여졌다. 한 가지에 깊게 몰입할 때 우리는 ‘무아지경’이라고 하는데 이때 ‘무아(無我)’란 ‘나’가 없다는 뜻이 아닌가!

 

 

‘나’가 ‘뇌’를 방해하는 사례는 일상에서 무수히 벌어진다.

2000년 PGA투어에 데뷔한 탱크 최경주는 성적 저조로 퀄리파잉스쿨을 치러야 했다. 퀄리파잉스쿨이란 PGA 진출권이 걸려 있는 대회이다. 일명 ‘지옥의 레이스’라고 불릴 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그때 신실한 기독교도인 최경주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실력이 아니라 자꾸만 성적에 집착하는 자기 모습임을 깨닫고 교회에 가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제가 타수를 생각하며 치지 않게 하시고, 제 마음을 비우고 치게 해주십시오.”

미국 메이저리그베이스볼에서 뛰고 있는 한국인 타자 추신수도 성적 부진으로 마음고생을 할 때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사실은 잘 아는데 그게 잘 안 된다.’고 말하곤 한다. ‘나 때문에 팀이 졌다, 나 때문에 아내가 고생한다, 내가 그들을 실망시켰다’ 그런 생각들이 마음을 괴롭히기 시작하면 야구공이 골프공처럼 작게 보인다.

 

 

이들만 그런 게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를 의식하는 순간 위축되고 소심해진다. ‘잘해야 해, 사람들이 보고 있어,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 두려워, 나는 패배자야, 나는 끝났어, 도망치고 싶어’ 하는 생각이 커지면 뇌는 마치 가느다란 끈에 묶인 코끼리처럼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 코끼리의 고통 받는 울음소리, 그 소리가 들리는가? 그 소리가 바로 ‘나쁜 기억’이다.

“자꾸 생각나는 ‘나쁜 기억’은 뇌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 당신이 문제를 회피하거나 상처로부터 도망치려고 할 때 뇌는 되풀이해서 나쁜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사람들은 두통, 어지럼증, 피로감, 목 결림, 감기가 찾아오면 ‘요즘 너무 무리했군, 좀 쉬어야겠어.’ 하고 생각한다. ‘나쁜 기억’도 ‘두통, 감기’처럼 뇌가 보내는 신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신호를 모른 척한다. 외면하려고 한다. 떨쳐내려고 한다. 저자는 나쁜 기억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나쁜 기억이 왜 자꾸 찾아오는지 그 이유를 깨닫고, 반갑게 맞이하라는 게 이 책의 메시지이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뇌는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있게 된다. 뇌를 계발하고 싶다면 ‘나’로부터 ‘뇌’를 해방시켜야 한다.

 

 

 

 

 

 

이 책의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