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은희경의 첫번째 책. 태연한 인생.

 

아주 오래전 어느 봄날 류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공중전화부스의 유리에 기댄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가냘픈 몸매에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연녹색 원피스와 흰 스웨터 차림이었다. 한 손으로 전화기를 귀에 대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녀의 얼굴은 희고 투명했다. 옆구리에는 책과 노트를 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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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얼굴 가득 그 웃음이 퍼져나가면서 마치 봄 햇살이 비쳐든 듯 갑자기 전화 부스 안이 환해졌을 때, 엄청난 볼티지의 전율이 류의 아버지의 심장을 강타했다. 그녀로부터 흘러나온 그 강력한 빛은 순식간에 류의 아버지가 서 있는 곳까지 뻗어와서 그의 두 발목을 꽉 붙잡았다. 그곳은 대학교 앞의 버스정류장이었다. 류의 아버지는 물론 자기의 집 방향과 상관없이 그녀가 타는 버스에 뒤따라 탔다. 그날이 류의 부모가 처음 만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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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주변 인물들에게 온갖 냉소를 퍼부으며 들어맞지 않는 추측을 일삼는 이혼남 소설가 요셉이 대학 강사 시절 소설 창작을 가르쳤던 제자 이안에게 ‘위기의 작가들’이라는 영화 출연을 요청받으며 벌어지는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온갖 냉소를 퍼부으며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던 요셉은 이안의 영화 제작을 지원하는 문화재단의 팀장이 헤어진 옛 연인 류라는 이야기를 듣고 돌연 흥미를 보인다.

등장인물

 

P9. 어머니는 마음을 쉽게 바꾸지 않는 순정파였다. 그것은 오히려 류의 아버지가 사로잡힌 맹렬한 불꽃에 산소가 포화된 바람을 불어넣었다.아버지의 갈망은 산불처럼 타올랐다.즉각 자신의 모든 낭만적 기질과 무분별한 행동력을 총동원한 끈질긴 구애가 시작되었다.

 

P10.그리고 거기까지가 류의 부모에게 허락된 사랑의 서정시대였다.

 

1.류의 부모

 P13.시간의 흐름과 길어지는 그림자 속에서 어머니가 또 한가지 본 것은 자기 인생의   퇴락이었다.

 P14.상처받지 않으려면 의심스러운 것을 의심하지 않아야 했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류와 요셉의 이야기보다 오히려 내 마음을 두드리는 이야기는

류의 부모이야기였다. 서사의 세계와 그에 수반된 고통의 삶을 선택한 류의 어머니와 반대로 이미지의 세계를 택한 무책임한 매혹을 택한 류의 아버지.이렇게 이분법적인 세계를 통해서 작가는 두가지 사랑방식 속에 생겨나는 치명적인 고통 혹은 고독을 함께 그려냈다.

 

특히 류의 어머니는 남편의 외도를 경험하며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꽉 쥐는 모습을 통해 상징적으로 기억된다. 류와 요셉의 이야기보다 오히려 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이야기.

류의 어머니가 겪는 고통의 서사부분이 매우 흥미롭다.

 

2. 무관심과 냉소주의의 요셉

 

P44.악행질량불변의 법칙이란게 있거든.세계의 악행에는 정해진 총량이 있는데 내가 안하면 다른 나쁜놈들이 나쁜 짓을 다 해버릴 거 아냐.

 

P171.누군가를 약자로 만드는 것은 강자가 아니라 바로 그처럼 강약을 나누는 틀이고 그리고 그 틀에 스스로 편입되는 자들이다.

 

요셉이라는 인물은 약간의 허세와 자존감을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인물이다.

밉상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그의 모습이 가끔 처연하게 느껴진 이유는

류 라는 한 여자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십년 동안 류와의 재회를 수없이 상상해왔던 그

몇년만에 류와 만날 기회를 가진 그가 류와의 만남이 불발됨에 아쉬워하는 모습이나

류를 보기전 거울을 통해 자신의 머리를 다듬는 장면들.

 

 

3.이안

P43.이안은 또 한번 자기다운 고지식한 이분법으로 맞받았다.

이안은 요셉의 제자이며 지인이다. 어느정도 요셉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며

요셉의 아이러니하고 허세적인 위선에 대한 경멸을 품고 이를 자신이 연출한 연극에서 적나라하게 파헤지며 복수 아닌 복수를 꿈꾸는 인물이다.

 

 

 

4.류가 살아가는 상실의 세계

 

 P16.살아오는 동안 류를 고통스럽게 했던 수많은 증오와 경멸과 피로와 욕망 속을 통과한 것은 어머니의 흐름에 몸을 실어서였지만 그녀가 고독을 견디도록 도와준 것은 삶에 남아있는 매혹이었다.

그곳에서는 태어날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원하며 그것을 상실이라고 불렀다.

부모의 이중적인 사랑방식을 일찍이 목격한 그녀.그리고 옛 연인 K와 절친의 외도를 통해 그녀는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 존재가 되었고 그로인해 요셉을 떠나게 되는 인물로 그녀진다.

 

5.도경과 이채

요셉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요셉을 사랑하는 인물이며

이채는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어린인물로 역시 요셉과 관계를 이루고 있다.

P167.데이트였어요? 근데 이게 다예요?

젊음과 당돌함의 캐릭터인 이채라는 인물과

도경의 유쾌한 캐릭터가 있었기에 너무 무겁지않게 책을 읽어나갈수 있다.

 

 

 

P103.우리 모두에게 자기 인생의 작가라는 권능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일회성 우연이며 어떤 것이 내 인생의 플롯으로 가는 노선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엇을 포착하고 무엇을 흘려보내야 할까.

 

우리는 지금도 태연한 인생 속에 몸담고 있다.

몇 번씩 사랑을 하고 가슴 쓰라린 이별로 겪지만 그토록 마주치지 싫고 눈뜨기 싫은 하루와의 만남을 우리는 피해갈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어제와 같이 태연하게 인생 속에서 각자의 드라마를 쓰며 살아가고 있다.

작가가 말하려고 했던 것도 그런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책의 초반부에 정말 아름다운 사랑의 묘사장면을 심어놓고서 극 중반부 이후부터는 온통 엇나가는 사랑이야기가 들끓고 끝내 류와 마주하지 못하는 요셉을 통해 결국은 낭만주의와는 다른 흐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태연하게, 혹은 태연한 척,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

 

책 초반부는 사랑의 서정시대, 낭만주의로 마음을 이끌고

중반부에는 캐릭터들의 재미와 류와 요셉의 과거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끝부분에서는 갑자기 연극대본 형식을 도입하면서 독자의 몰입도를 증가시킨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부분에서 류의 부모의 첫만남을 말하고 류의 가슴아픈 내면을 이야기한다.

 

은희경이라는 작가는 정말 매력적인 작가구나.하는 생각이 절로드는 그런 작품이었다.

 

류는 자신이 매료된 것이 태연함 속에 깃든 파탄의 맛이란 것을, 열렬한 삶 속에 깃든 차고 날카로운 죽으므이 맛이란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내가 잠시 길을 잃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그 꽃을 발견하지 못했겠지...

 

 

그외

 

그밖에 작가인 요셉이 문단과 글집필에 관련하여 하는 대사들이 마치 은희경 작가 자신이 하고 싶은 생각이나 말을 대신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 점도 무척 흥미로운 소설!!

 

 

P11.누구나 지나간 일은 자기 식대로 편집해서 기억한다.

P26.충고를 구하는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희망을 기대했다.

P.여자애들이 혁명보다 혁명가를 좋아해서 운동했다더니 남자애들은 정의보다 정의를 집행하는 힘에 도취됐던 거야?

P86.섹스를 하는 것보다 섹스 후에 함께 잠드는 것이 진짜다.

P138.글이 잘 써지는 날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13월이나 제8요일 같은 것이다.

태연한인생, 은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