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필 수 없고 이슬 내리지 않는 곳엔 열매도 없다."(無風天地無花開 無露天地無結實)는 법문 한 구절을 붙들고 혁명을 시작만 해놓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던 김재규와 영문도 모른 채 끌려들어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도 상관을 배신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함께 죽어간 부하들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가슴이 쓰라렸다.

 

  10. 26의 전후 상황, 고통받고 유린 당했던 사람들의 참혹한 현실을 제대로 알 지 못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유신의 원흉이 숨지고 신군부가 12. 12 쿠테타를 일으켜, 5.18 광주 항쟁에서 무고한 시민을 학살할 즈음 무엇을 하고 있었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길렀다. 직장에 다니며 살림하느라 다른 곳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다. 이런 얘기로 변명하기엔 너무나 커다란 상실이고 비극의 역사였다.

  

  물러설 줄 모르는 야수, 박정희와 순수하고 이성적이며 이상주의자였던 김재규의 만남은 비극적 결말로 치닫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모른다. '국토를 참절하고 국헌을 문란케 한' 내란죄를 저지른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면죄부를 받은 반면 유신을 끝장내고 민주국가로의 회귀를 기도했던 김재규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당했다. 부패한 정권을 떠받치고 있던 그가 돌아서 그 심장에 총을 쏘았고 유신 악법의 철폐를 원했던 사람이 그 법에 의해 고문과 수모를 당했으며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역설과 아이러니다.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국민들에게 그것을 되돌려주면 혁명이 저절로 이루워지리라 낙관했던 순진한 군인, 김재규의 진정한 모습.  끝까지 의연하고 확고한 자세를 보였던 초인적인 의지.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면서도 한결같이 그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보여준 아까운 부하들의 순정. 그들을 살려보려고 동분서주하면서 온갖 위협과 고통을 감수했던 변호사들의 의리. 하루 아침에 혈육을 빼앗기고 천길나락으로 떨어졌던 가족들의 비통함. 이 책에 모든 것들이 버무려져있다.

 

  우리의 가슴 아픈 현대사에 대한 기록이며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진실, 인간성에 대한 통찰이 담겨있는 김재규 평전. 이제라도 진실이 볕을 보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가. 오랜 세월 고통 받았을 유족들에게 작은 위로라도 줄 수 있고, 아직도 폭력과 부조리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는 이들에게는 격려가 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특히 이제 유신시대의 내 나이가 된 아들 세대의 젊은 사람들이 많이 읽어주기를  아울러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