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문예비평가, 번역가이자 철학자인 발터벤야민은 온갖 자료의 인용문과 그에 대한 논평, 주석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분량의 책<아케이드 프로젝트>를 기획했지만 미완성으로 남기게 된다. 그는 <일방통행로>에서 "내 연구에 있어서 인용은 길에 숨어 있는 강도들 같다."고 말한다. '인용'이 주는 본문 이상의 가능성을 언급한 철학자 발터 벤야민. 

쇼펜하우어가 쏟아낸 말들을 오밀조밀하게 붙이고 다듬어 아주 짧은 저자의 논평만을 달아놓은 책,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읽기>는 '인용의 책'이라고 부를 만한 생경한 종류의 독서였지만, 발터 벤야민이 도전했던 프로젝트는 더 앞선 '인용의 몽타주'였다. 

쇼펜하우어가 "인용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박식함을 자랑하지만 독창성은 희생시키고 만다."라고 했던걸 염두한다면 <유쾌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읽기>의 저자나 발터 벤야민이 독창적인 글쓰기의 모범이라고 할 순 없다. 


인용의 책

그렇다면 지금 서점에 있는 책에 대한 책, 영화에 대한 책, 친숙한 인문학 서적들 중 '인용'의 힘을 빌리지 않은 책을 찾아볼 수 있을까. 더 확장하여 창작물을 제외하고 인용구를 들이대지 않는 책들을 발견한다는 건 횡재에 가깝지 않을까. 순수문학의 경우에도 선대의 멋들어진 한 문장으로 소설 전체를 대변하고, 깊이를 더하려는 노력은 끊이지 않는다. 

'인용'은 어느새 독서의 깊숙한 수렁으로 자리잡았다. 소설의 서문을 대신하는 인용구를 '안내 표지판'삼아 소설을 해독하고, 책 혹은 영상을 텍스트 삼아 쓴 비평서, 인문서들은 두말할 것 없이 '인용'이 필수의 조건이다. 북로거들의 서평 또한 원본없이 존재하기 힘든 일상적 독후감의 장이 되고 있으며, 학자들의 책은 사유에 대한 사유로서 '인용'을 일삼고, 책의 핵심을 결정하거나 새로운 사유를 발생시킨다. 

고도의 순정한 예술이나 천재적인 학자의 파격적인 가설을 제외한다면, 책속에서 수 많은 책을 찾고 생각 속에서 수많은 생각의 갈래를 발견하는 건, 이미 정형화된 '책'의 한 가지 모습에 다름없다. 

인문학의 위상을 재발견했던 한국정책방송의 '인문학 열전'을 책으로 편 <인문학 콘서트>의 인터뷰이들도 하나같이 이전의 학자들의 주장을 옮겨적고 현재의 학술적 가능성을 타진한다. 15명의 철학자들을 코스요리의 재료로 사용하면서 익살스런 상황극을 꾸민 <잘난척하는 철학자를 구워삶는 29가지 방법>역시 철학자의 말, 말, 말 들이 책의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미료가 된다.
헤밍웨이가 쓰지 않은 소설작법서<헤밍웨이의 글쓰기>가 헤밍웨이의 말들을 인용한 것만으로 책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별로 놀랍지도 않다. 흔히 말하는 리뷰 혹은 독후감이 책으로 묶인 <청춘의 독서>나 <질문을 던져라 책이 답한다>역시 책으로 쌓은 책블록이다.    


시네필 다이어리

'철학자와 영화의 만남'이라는 부제로도 모자라 '8명의 철학자가 읽은 8편의 영화'라는 띠지를 두름으로써 행여나 진짜 철학자가 평한 영화라는 오해를 사지는 않을까 했던 <시네필 다이어리>도 '인용구'로 가득하긴 마찬가지다. 인문학도 정여울이 철학자의 텍스트와 영화의 맞선을 주선하며 마담뚜의 역할을 야무지게 해낸다. 

원 텍스트가 존재하는 책들에 대한 부담감이라도 읽은 것처럼 저자는 영화의 주요부분을 영화만큼 실감나게 전달한다. 굳이 영화를 보지 않고도, 철학같은덴 무정해도 단절없이 읽어나갈수 있는게 미덕인 책이다.  

<쇼생크 탈출>이나<센과치히로의 행방불명><색,계>가 철학자와 만나지 않았을 때, 혹은 가스통 바슐라르가 니체가 조셉캠벨이 영화와 만나지 않았을 때, 그들은 모두 낱낱이 부서진 이름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악명높은 감옥에 갖힌 앤디가 니체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를 '초인'의 모형으로 새삼 떠올릴 수 있었을까. '센'이 신화학자 조셉 캠벨을 만나 '신화적 상상력'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 실감할 수 있는 열쇠를 어디에서 얻을 수 있었을까. 몽상적 철학자로서 난해한 언변만 각인시킨 '가슈통 바슐라르가 '원령공주'를 만나지 않았더면 어떻게 그의 희미한 몽상에 촛불을 켤 수 있었을까.

통섭 

'통섭'의 중요성을 설파한 <인문학 콘서트>의 첫 단락을 보기좋게 구현한 책이 바로 <시네필 다이어리>였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만나 발효되는 지점. 그리고 대중문화와 인문학이 만난 그 자리에 바로 '인용'의 힘이 자리하고 있었다. 철학자의 말, 영화의 대사, 곧 인용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시네필 다이어리>. 

"내 연구에 있어서 인용은 길에 숨어 있는 강도들과도 같다. 무장을 한 채로 갑자기 나타나 한가롭게 거니느 사람을 붙잡아 그의 확신을 모조리 빼앗아 가는 강도 말이다." -발터 벤야민 (<잘난척하는 철학자를 구워삶는 29가지 방법>에서)   

영화에 대한 싱거운 확신을 모조리 빼앗아가는 철학자가 없었다면 <시네필 다이어리>는 한적한 영화 산책로 정도였을 것이다. 갈수록 불확실해지는 세계를 포착하기 위해 콜라주 기법과 알레고리의 힘에 의지했다는 발터 벤야민의 '인용의 몽타주'는 선구적이었다. 창작 뒤에, 몽상 뒤에 자리한 사유의 세계는 독창적이거나 독보적이고 위대한 업적은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창작하고 창조하는 예술가일 수는 없다. 상상력의 주요 매체로 꼽히는 '책'이 생각을 통해 재생산되는 생각이란 사실은 좀 아이러니 하기도 하지만 이쯤해서 '통섭'의 의미를 다시 떠올려보는 것도 좋겠다. 

물리적 결합이 통합, 화학적 결합이 융합 이라면 '통섭'은 두 가지 이상의 물질이 만나 뭔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발효의 과정과도 유사하다.(<인문학 콘서트>에서 정리)

본래의 형태를 잃지 않으면서 맛이 달라진다? 어미에게서 나와 어미와 다른 인생을 살듯이, 책에서 나와 다른 책을 꾸리는 일이 꼭 독창성을 희생시킨다고 폄하할 필요가 있겠냐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