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번째 계절>. 잔잔한 여운을 느끼게 하는 글의 분위기와 제목이 참 잘 어울렸다. 더불어 표지도. 내가 좋아하는 로맨스소설 작가 중 한명인 신해영작가의 매력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심리묘사가 정말 탁월한 소설이었다. 원래 내가 감정이입이 잘 돼서 눈물 또한 잘 흘리는 편이긴 한데 워낙 심리묘사가 섬세하다 보니, 읽는 내내 지윤이 되어 가슴 아려했었다. 때로는 조마조마 하고 때로는 누구를 향한지도 모를 원망과 탄식을 내뱉고, 가슴 아파하고. 함께 호흡한다는 즐거움을 준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에필로그를 향해, 책 마지막 장을 향해 뻗치려는 내 손을 막는 것이었다. 과연 두 사람은 이루어졌을까? 설마, 두 사람이 이루어지지 않아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지? 호기심과 두려움에, 그냥 에필로그를 보고 마음 편하게 읽을까 하고 유혹에 질 뻔하기도 했지만 <열일곱 번째 계절>의 주인공들에 온전히 이해하고 싶어, 흐름에 따라 몰입해 읽어 나갔다.

미혼모였던 엄마를 사랑한 남자. 다섯 살, 혼자 남겨진 그녀를 거둔 남자. 어릴 적에는 아빠라 불렀지만 어느새 그녀에게 다른 의미가 되어 버려 차마 아빠라 부를 수 없게 된 존재인 형준을 향한 힘든 사랑을 시작한 지윤. 야무지고 뭐든지 혼자서도 잘하고 똑똑한, 어른스러운 지윤이지만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만큼은 그녀도 어쩔 수 없는 열아홉 소녀다.

열여덟 첫 눈에 반한 과외선생님, 아이가 있는 미혼모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사랑했고, 그를 한낱 귀여운 제자이자 동생으로 밖에 보지 않아도 좋았던 그녀를 사고로 잃은 후, 남겨진 그녀의 아이를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거둔 순애보적인 남자 형준. 사랑한 여인의 아이였던 지윤이 어느새 그에게 다른 의미가 되어버렸다.

처음 책을 펴 지윤이 되고 형준이 되었을 때, 이들의 사랑이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 법적으로도 혈연적으로도 아무 관계도 아닌 그들이지만 십수 년을 가족으로 함께 해왔고, 형준의 짝사랑이었다고는 하나 그들의 사이에는 지윤의 엄마인 혜민이 존재하니깐. 두 사람의 나이차이도 장애가 되기 충분했다. 서른 네 살의 남자와 열아홉의 소녀. 뭐, 요즘에 이보다 더한 나이차이가 나는 커플들을 봐서 그런지 이젠 무감각해져 가는 듯도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장애물은 많아 보였다. 무엇보다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채 선 하나를 그어두고 차마 넘어서지 못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그들의 사랑에서 큰 장애가 아니었을까. 그 선을 두 사람이 어떻게 넘어설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주위 사람 모두가 반대했지만 스무 살 어린 나이에 다섯 살 아이의 보호자가 되기를 자청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그것도 부모와의 연까지 끊고. 형준이 느꼈을 중압감이 이해되었다. 물론 그런 입장에 처하지 않는 이상 완전히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막연한 상상만으로도 스무 살이었을 때의 나를 상상해봐도……. 자기 앞가림하기도 힘든 나이에, 학업과 육아를 병행한 형준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의 아이도 아닌데. 물론, 혜민의 사고가 그의 탓이라는 죄책감이 더욱 그를 몰아붙였던 것도 같지만……. 그래서 한순간이나마 그가 잘못된 선택을 통해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 했던 행동이 이해되었다.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밖에 의지할 곳 없는 어린 지윤을 두고 혼자 떠나버리려 했던 그의 행동이 조금은 무책임하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그도 어린 나이였으니깐.

형준이 지윤의 보호자이고, 지윤을 키웠다지만 그녀를 보고 있으면 참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들고, 오히려 형준을 보살핀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주위 사람들은 형준을 향해 할 만큼 했다, 이제 그만 무거운 짐을 벗어버려도 되지 않겠느냐, 지윤도 형준의 도움 없이 자립할 만큼 자랐다고 하며 형준의 살 길을 찾아가라고도 하지만…… 형준을 보고 있노라면 지윤 없이는 못 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윤을 길러왔던 긴 시간 동안 어느새 그녀에게 길들여버려진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그는 지윤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혜민의 죽음을 그의 탓으로 돌리며 자책했던 시간들 속에서 그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지윤때문이었다. 지윤을 지키기 위해 그는 강해져야 했고, 살아가야할 의지도 생겼다. 한순간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했지만 그 때도 지윤에 의해 다시 살아났고.

평범하지만은 않은 관계. 남들에게는 나이차 적은 부녀관계로 보이는, 하지만 어느새 남자와 여자가 되어 서로를 바라보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사이인 형준과 지윤이 서로를 향한 특별한 마음을 내비치게 되는 촉매제는 은수와 우영이다. 형준의 오랜 친구이자 그를 좋아하는 은수와 지윤을 좋아하는 동갑내기 친구 우영. 은수야 형준의 오랜 친구인만큼 형준, 지윤과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지만 우영이라는 지윤의 이성친구의 등장으로 형준이 조금씩 반응을 보이고, 친절한 은수지만 그녀를 이유 없이 불편해 했던 지윤은 결국 형준에게 그녀의 마음을 드러낸다.

서로를 향한 감정이 수면 위로 드러났지만, 쉽게 인정할 수도 기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형준은 더 도망치려고만 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지혁의 충고는 지윤에게 하기는 싫지만 해야만 했던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이별은 싫지만, 이 이별이 오히려 두 사람에게 있어 전환점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별이 있었기에 서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함께 할 미래를 꿈꾸게 되었으니깐. 가족이었던 형준과 지윤이 다른 의미가 가족이 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니깐.

앞에서도 말했지만 신해영 작가는 심리묘사가 아주 훌륭하다.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글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힘을 지녔다. 그리고 절제미가 돋보인다. 때때로는 이런 절제가 과해서 아쉬울 때도 있지만 이번 <열일곱 번째 계절>은 신해영 작가의 탁월한 심리묘사와 절제미가 잘 어울려 빛을 발한 작품이었다. 혈연관계도 인척도, 법적으로도 아무 관계가 아니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사회적 통념으로 보면 두 사람의 사랑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비판의 대상이 될지도. 하지만 서로의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익숙하고 자연스런 두 사람의 관계가, 서로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진정성이 잘 느껴져서, 그들의 심리가 잘 이해되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형준과 지윤의 사랑을 응원하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크리스마스로 표현했던 지윤처럼, 이 작품은 내게도 크리스마스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