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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고 말다.

소설의 첫 시작에서부터 학교의 선과 더불어 살인의 선도 역시 한번 넘으면 그 다음은 그리 어렵지 않음을 이야기하며 살인으로 이어질 앞으로의 이야기를 암시해주고 있었다. 오랜 명문인 세인트오즈월드문법학교의 수위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사택에 살게 된 나는 늘 넘어서는 안될 교문 안 세상을 동경하며 받아들여지지 않는 자신의 신분 격차를 실감하고 불운한 처지에 괴로워한다. 내가 다니는 서니뱅크파크 종합학교는 빈민층의 아이들이 다니는 곳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은 놀림감이 되고, 괴롭힘의 대상이 될 거라는, 한마디로 날 통째로 집어삼킬만한 곳이었다.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될 선이었지만, 아주 우연히 그 선을 넘어 들어간 후에는 아버지의 만능 키를 갖고 학교 안 이곳저곳을 활보하다가 교복까지 훔쳐입고서 세인트오즈월드 문법학교 학생으로 숨어 살게 되었다. 서니뱅크파크를 다니며 중간중간 도망을 친후 세인트오즈월드의 달콤한 꿈에 빠져들곤 했지만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고, 그 과정에서 리언이라는 세인트오즈월드의 아웃사이더 친구 하나를 사귀게 되어 진심으로 자신이 세인트오즈월드의 일원이 된양 착각을 하게 되었다. 가진 재산도 없고, 신분 차이도 많이 나서 절대로 들어갈수 없는 학교, 그러나 너무나 다니고 싶었기에 더욱 반발감이 들었던(갖지 못해서 더욱 증오하게 되었달까?), 정신적으로는 나(소설 속 화자)와 너무나 잘 맞는 그런 학교였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중간중간 다시 헷갈리지 않도록 되짚어야 했던 것이 화자인 '나'는 세인트오즈월드의 가짜 학생 말고도 라틴어 교사인 로이 스트레이틀리도 있었다. 둘의 이야기가 교차적으로, 게다가 세인트오즈월드의 가짜학생인 경우에는 과거 학생이던 시절과 내가 자라서 세인트오즈월드 교사로 부임해 오게 된 성장의 이야기까지 겹쳐져서, 총 시공간이 다른 '나' 세명의 이야기를 읽게 된 셈이었다. 그게 좀 복잡하게 느껴지기는 하였지만 줄거리 흐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젠틀맨'과 플레이어의 이 게임에서 열두번째 선수가 되는 것! 투명인간에게도 그림자는 있다. 그러나 세월과 더불어 점점 더 길어진 내 그림자는 세인트오즈월드의 어두운 복도에서 길을 잃었다. 376p

2차대전 이전의 영국 정상급 크리켓 경기에서는 경기자들을 '젠틀맨'과 '플레이어'로 구분했는데 '젠틀맨'은 보수없이 경기에 참가하는 유한계급의 아마추어 선수를 일컫는 말이고 '플레이어'는 보수를 받고 뛰는 직업 선수를 지칭한다. 376p 각주

지식에 목말랐고, 폭력이 난무하지 않는 한폭의 이상향과도 같은 세인트 오즈월드를 주인공은 몹시나 동경했다. 그리고 자신을 서니뱅크파크로부터 건져내주기를 아버지에게도 몹시 기대했으나 그의 대처 방식은 기대한만큼 철저히 나를 망가지게 만들었다. 세인트 오즈월드에서 철저히 가짜학생으로 완벽히 분장했음에도 아무도 그를 알아봐주지 못함에 그는 또한 절망하기도 하였다. 투명인간, 아무도 그를 몰라봐주는 한계. 그리고 새로이 사귀게 된 리언을 통해 장난삼아 하는 도둑질과 나쁜 행동들을 배우게 되는데, 그러면서 도리어 더욱 달콤한 감정에 빠져들게 되었다.

사건은 끝없이 암시가 된다. 반복되는 아버지의 이름, 그리고 무언가가 일어난듯한 느낌, 살인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점, 등등 여러이야기가 흘러나온다.그리고 새로 부임한 선생들 중에 예전의 그 아이가 있었다는 것으로 누구일까?를 추정하며 끝없이 의혹의 눈길을 보냈었다.

절대 해서는 안될 딱 한가지 실수,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뒷 부분을 펼쳐들었는데, 읽어서는 안될 결정적인 반전을 중반부에 이미 읽고 말았다. 헉! 다른 분들은 절대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길 바라며..

어쨌거나 알고 읽어도 여전히 충격적이기는 했다. 충격의 강도가 좀 약해지기는 하였으되.

그리고 초반부와 달리 중반 이후에는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여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결말에 이르기 전에 살짝, 혹시 이렇지 않아? 하고 추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거나 놀라운 결말들이 연이어 터지는 느낌이었다.

절대로 아닐거라는, 그런 생각이 강하게 박힌 것은 작가가 마련해둔 여러 장치 덕분이었다. 그 장치들 덕분에 보기좋게 속아넘어갔다.

500페이지가 넘는 꽤 두꺼운 분량이어서 읽는데 시간이 오래걸릴줄 알았는데 정말 재미나게 읽었다. 한 개인이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던 철옹성같은 학교가 한 개인의 철저한 공작에 의해 우르르 와해될 수도 있음을 드러내주는 놀라운 소설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