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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문상객

감회가 새로웠다. 소설이 출간 된 시기는 90년대 중반, 내가 이십 대일 때였고 그로부터 십 오년 후에 나는 이 책을 만났다. 그땐 아마 성석제라는 작가를 들어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나에게 이 책이 2011년도에 처음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했다. 십 오년 전에 작가의 첫 장편으로 출간된 이 소설을 그때 보았더라면 나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학은 시대의 거울이다, 라고 배웠다. 정치에 문외한인 내 기억으로도 이 소설이 출간된 시기는 97년 대선을 앞둔 시점이었고 아직은 3金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않은 시절이었다. 늘 그렇듯 구태의연한 인물은 있었지만 내세울 만한 인물이 없었던 정국을 틈타 사후영향력에선 여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박정희 담론이 고질적 향수병처럼 등장하던 시기도 그때였다. 세월이 지나고 나니 그때는 몰랐는데 ‘대선’이라는 국가적 이벤트는 훗날 선명한 추억의 한 정거장으로 여겨진다. (신기한건 이 소설의 재출간 역시 다음의 대선을 앞둔 시점이라는 것) 만약 내가 그 시기에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거인의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세간의 백성들에게 소설로 화답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인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소인배들이 너도나도 용상을 꿈꾸며 활개를 칠 때 무릇 문학의 거리로 뛰쳐나온 한명의 영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재자의 그림자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실제로 작가가 젖을 떼기 전에 등장해 대학에 입학하던 해까지 18년간 존재하던 유일한 거인이 박정희였다는 씁쓸한 고백은 내 유년기를 꽁꽁 지배하던 거인의 기억과 맞물리며 이 소설을 박정희 트라우마에 대한 (자전이 아닌)자정(自淨)문학으로 여기기에 충분한 배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독재자라고 해도 그 사라지는 뒷모습은 누구보다 애절하지 않은가. 영웅의 부고는 그 후속기사를 알고 있기에 더욱 아픈 것이리라. 작가는 이렇게 물었을 것 같다. 역사의 평가는 매정할지라도 문학으로의 회상은 치유가 아니냐고. 몸이 허약하고 정신이 혼미할 때 유령이 보이듯 소신없는 정치인, 나약한 정국, 부실한 경제상황에서 무소불위 절대 권력자를 떠올리는 건 인지상정이 아니냐고. 그런데 희안한 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 소설의 자정능력은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아마 십 여년이 더 흘러도 효과는 여전하지 않을까.

물론, 지금의 나는 주인공이 ‘왕을 찾아서’ 떠나는 길을 독재자에 대한 향수와 연민으로 이해하진 않았다. 오히려 과거로의 회귀보단 앞날에 대한 불안을 더 많이 느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월이 흘렀고 나도 인생의 변화가 많았던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을 따라가는 일은 두 명의 독자가 나란히 손을 잡고 장지를 따라가는 사이좋은 문상객이 되는 일이었다. 기이한 경험이었다. 분명 두 사람인데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한 사람이었고 만감이 교차하듯 매순간 추억과 재회하며 주인공의 꽁무니를 좇아가는 이번 여행길은 짐짓 숙연하기까지 했다. 옛날엔 그랬는데 지금은 이렇지 식의 두 가지 혼선된 감상은 때마침 장원두의 여행길에서의 (과거)회상과 장례식장에서의 (현재)회한과 나란히 맞물리며 많은 것을 생각케 했다. 두 배의 에너지를 쓴 탓인지 책을 덮고 나니 마치 남도의 내 고향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피곤한 느낌이 들었다. 상주도 아닌데 삼일장을 치르고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달까. 나는 흡사 고향 친척의 상이라도 치르고 돌아와 허탈한 기운에 눕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 느낌이었다. 고왔건 미웠건 오랜 세월 가슴속의 영웅이 사라진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상실이었다. 혹시 작가는 오랜 세월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하던 안보이던 영웅을 굳이 꺼내들어 확실히 묻어 버리고 오는 전 과정을 우리에게 상세하게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영웅이 사라지는 현장을 시시각각 중계 하는 일은 결국 자신의 영웅을 산산이 분해해 처절하게 버리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산모가 아이를 출산하듯 제 몸에서 피와 살을 분리해내는 엄숙한 순간이자 극도로 고통스런 기억일 것이다. 작가의 영웅소거 현장에 동참하였다는 자각은 책을 덮고도 한참 후 들었던 깨우침이었고 나는 상실의 슬픔에 동화되어 상중인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다. 미련이야 말로 관람객의 몫이 아니던가. 공교롭게도 이 소설을 덮었을 때 세기의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타계소식을 접하곤 그렇게 한 시대는 가는 것이구나, 어느 분야든 영웅이 진다는 건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 세월임을 인정해야 하는 잔인한 일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이야기

소설은 이미 죽은 마사오라는 왕을 만나러 가는 장원두의 버스여행길에서 시작된다. 죽은 자와의 재회를 기다리는 시간이 소설이 완성되는 시간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듯 고향을 향해 운전하는 버스기사의 몽환적 드라이브는 누구보다 복잡한 심경의 탑승객을 알아달라는 호소로 보여 인상깊었다. 그런데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동네 정치성향적 성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특이한 매력이었다. 먼저, 거리의 왕자이면서 광복이후 지역의 최초건달이자 깡패인 신화의 주인공 마사오의 한국식 이름은 ‘박정부(朴正夫)’였고 마사오가 여름밤의 보름달이었다면 냇가의 반딧불이 정도되는 화자의 이름은 ‘장원두’였다. 일제 끄나풀이었던 아버지와 재일동포 어머니 사이에서 광복 몇 달 전에 맏아들로 태어난 마사오는 일제의 창씨개명정책에 따른 일본식 이름을 죽을 때까지 사용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그를 박정부가 아닌 마사오로 부르길 원했을까. 아니 그는 왜 박정부로 살지 못했을까.

해방 전에 출생한 내 부모님에게서 학교다닐 때 일본식 이름을 사용해야 했다는 아픈 추억을 들은 적 있다. 이 책에 언급된 하루꼬(春子)는 내 막내이모의 이름이기도 했는데 끝에 ‘子’자 돌림이 많았던 그 시절 모든 딸들의 이름은 아키꼬(明子)나 하나꼬(花子)식의 ‘꼬’자 돌림으로 통일되었다고 한다. 어른들끼리 남도식의 사투리로 그럼 ‘고자’는 ‘우야꼬’겠다는 우스갯 소리를 기억한다. 부모님 세대에 마사오같은 ’해방동이‘(해방되던 1945년에 태어난 사람)는 우리 세대에 등장한 밀레니엄 베이비와 비슷한 사회적 의미를 지니지 않았을까. 해방과 동시에 태어났으니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한국의 주체성을 확립하는데 기둥같은 역할을 해야하는 세대, 그러니 누구보다 마사오같은 일본식 이름은 당장 잊어버려야 할 세대인 것이다. 그건 시대적으로도 386 이후 세대에 속하는 내 세대보다는 전후 베이비붐 세대에 해당되는 작가세대와 더 밀접해 보이는 왕위계승의 전제적 조건과도 같았다. 그런데 작가는 왕의 자리에 앉힐 인물의 이름을 굳이 마사오라는 친일작명을 고집하며 그가 끝까지 마사오라 불린 지역의 정당한 논리를 주장했다. 슬몃, 미소가 번지는 일종의 복수라는 생각을 한다.

마사오의 한국이름은 박정부(朴正夫)로 이른바 ‘박씨’ 성을 가진 ‘바른 사나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작가는 그가 부도덕한 ‘정부(情婦)’와 부실한 ‘정부(政府)’처럼 불리워지는 것이 싫어 ‘바른 사나이’의 ‘정부(正夫)’를 버리고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 ‘다까끼 마사오’와 같은 이름을 네이밍, 죽을 때까지 호명하였다. 짜릿한 필연의 일치였다. 작가는 아마도 유년시절엔 6.25를, 10대엔 4월 혁명을, 20대엔 유신독재를, 30대엔 광주항쟁을 겪어온 삼촌벌의 마사오 세대를 위해 정부라는 이름을 예의상 부정한 것은 아닐까. 혹시 마사오로 하여금 평생 일본식 이름을 유지하도록 하여 박정희의 일본육사출신의 친일경력을 부러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박 정부’(박통의 정부)는 결코 ‘박정부’(바른 사나이)는 될 수가 없었다는 의미심장한 작명의 이치를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더불어 한때 일본군에 충성한 적 있었던 인물을 왕(대통령)으로 받들어야 했던 우리 국민의 이중적 심리도 겸사로 슬쩍 꼬집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 작품의 제목이 ‘왕을 찾아서’ 이기에 왕을 마사오로 보고 그의 이름이 박정부였다는 것을 갸우뚱 거려보면 작가의 농담은 참 치밀하고도 뼈아픈 고도의 진담이 아닐 수 없었다.(그는 원래 농담으로 진담을 전하는 작가이니까) 표면적으로는 장원두의 유,소,청년기를 지배한 그 시절 왕과 내가 살고 있었던 곳을 향해 ‘왕을 찾아서’가는 길이었지만 우린 아직도 진정한 ‘왕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실정이므로 앞으로의 ‘왕을 찾기 위해’ 가야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그렇담 장원두의 왕(마사오)이나 우리의 왕(대통령)이 모두 죽어버린 이 마당에 우리가 찾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아니 우리가 찾아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박정부’의 작명을 중심으로 그의 주변 인물들도 하나같이 누군가를 연상시키거나 무언가를 빗대어 이름한 인물들로 가득했다. 충분히 소설적이었고 그래서 이야기다웠다. 소설의 화자인 ‘장원두’는 요즘세대에 익숙한 원두커피의 그것보다는 밭에 심어 기르는 각종 채소를 통털어 말하는 원두에 가까웠다.(그도 그럴 것이 장원두는 뉴페이스가 아니고 1998년 작가의 <궁전의 새>라는 작품에 이미 시골소년 주인공으로 등장한 바 있다.) 장원두의 고향은 ‘가파른 낭떠러지 아래 시커멓게 그을린 듯한 산천’으로 ‘세련되지 않고 멀리 보이는 모습조차 걍팍한 곳’으로 중부나 남부나 동부등의 수식이 붙지 않는 순수한 ‘지역’으로 통일되었다. 왕의 출생지이자 이야기의 배경이 서울이외의 지역인 특정 ‘지방’이 아니라 일정한 구역을 뜻하는 일반 ‘지역’으로 칭하는 것이 흥미로왔는데 지역감정을 배제한 서사임을 부러 암시한 네이밍이거나 역으로 서울이나 지방 할 것 없이 사람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상징도 의도한 것으로 이해되었다.(요즘이라면 당연 토목공사가 주특기인 한반도의 지역개발을 칭할 때 그 ‘지역’이겠지만) 물론 고속버스의 운행상황으로 보아 서사의 흐름상 그 ‘지역’이 강원도의 한적한 시골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 별명도 마침 ‘떡보’인 덕에 밭에서 나는 채소를 통칭하는 ‘원두’가 왕을 찾아서 떠나는 길은 고향에서의 자신의 추억과도 같은 ‘원두幕’을 찾아 가는 여행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였다. 밀떡을 좋아라하던 원두가 찾아간 곳은 실은 왕과의 추억이 아니고 왕이 있었던 무대, 원두幕에서의 추억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렇듯 소박한 이름을 가진 ‘장원두’는 영웅이 되지 못하고 영원히 영웅을 품고 사는 대다수의 소시민을 표상한다고 할까. 장원두의 다소 평범하던 이력에 비해 한날 한시에 태어난 고향친구 ‘박재천’은 무릇 인명은 재천(人命在天)이라는 사자성어에서 파생된 운명의 이름같았다. 실로 늘 아슬아슬 하던 그의 목숨은 하늘만 아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사오가 아닌 리틀 마사오를 염원하던 그의 성이 박정부와 같다는 것이 의미있어 보이긴 했지만.

마사오와 유일하게 맞먹었던 세계 대통령 ‘유신조’는 당시 유신정권에 대한 불만을 강물위에 편지로 띄워 보내던 로맨티스트였다. ‘유신조’는 오줌으로 세계지도를 그리며 세상을 조롱하는 민초형의 자유주의자였달까. 그의 이름이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기 위해 남파된 무장간첩 김신조와 같았다는 것도 작가의 뼈있는 농담으로 느껴졌고 그가 다리밑에서 하는 일이 실은 박통에게 보내는 신문고 역할이었기에 그것도 재치있게 생각되는 인물이었다. 다만 무장게릴라로서 유일한 생존자가된 김신조와 달리 거적떼기와 함께 쓸쓸히 강물에 떠내려가면서 최후를 맞았다는 사실은 가슴이 아파왔다. 누추하고 배운 것이 없는 거지신세와 같은 민초의 절박한 호소같은 건 이 나라의 정부가 알 바 아니라는 것에 마치 유유자적한 죽음으로 시위하듯 그는 스스로가 강물에 띄우는 유서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여인, ‘광자’와 ‘세희’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수컷 중심의 수컷 이야기에서 두 명의 여인은 이름만큼이나 상반되는 역할을 했다. 광자는 마사오의 누이로서 마사오를 업어 키우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모든 남성의 영원한 누이를, 세희는 심장이 약하고 미모를 가졌기로 권력을 거머쥔 남성을 좇아 변절하는 보스의 여인을 표상한다. 특이한 것은 한명은 세상을 초월한 여인으로 한명은 속세를 갈망하는 여인으로 등장했지만 두 명 모두 장원두의 그 시절 사랑이었다는 것. 세희가 세(世)속의 빛(熙)을 찾아 대통령이 될 성싶은 남성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면 광자는 대통령을 희망하는 남성의 뒤에서 묵묵히 그를 감싸 안는 한줄기 빛(光)이었달까. 동전의 앞뒷면처럼 자리는 달랐지만 중요한건 장원두에게 그들은 모두 빛이었다는 데 있었다. 미쓰꼬에서 광자로 정정한 마사오의 누이는 우리네 현대사에 질곡의 삶을 상징하는 누이신화의 주인공으로 크고 두껍고 거친 손으로 밭일과 집안일을 일궈온 남성 성공신화의 숨은 주역일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주연이든 조연이든 신화 내러티브를 능란하게 조율하며 이야기에 감칠맛을 더했다. 내가 이 세상을 빛나게 하겠다는 ’나세희’는 마사오 미망인의 동생으로 흡사 자애로운 영부인과 친인척 관계였던 정재계 유력인물을 연상케 했다. 미모와 사교술을 바탕으로 재력을 쌓은 거물급 여성인사의 이미지도 연상된다. 그녀는 유약한 심장과 백설같은 미모를 무기로 언제나 왕의 주변에 머물며 왕이 바뀌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자제들을 모두 정재계에 입문시키는 기염을 토하고 말 것이다. 이 작품에서 어린 시절 장원두에게 꿈같은 인상을 심어준 흰 팔뚝의 마사오의 여인은 그에게 전통적인 음식 ‘떡’이 아닌 서양음식 ‘카스테라’를 건네주며 영원한 이상적 환타지로 남겨진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는 달리 자애로운 국모로서 영부인의 이상으로 남게 된 육영수여사의 그것과 같이. 이렇듯 장원두는 감히 다가서지 못해 꿈에서까지 죄책감을 느끼던 희디 흰 팔뚝의 여인과 어린 아이처럼 낼름 받아 먹을 수 있도록 떡을 주던 누이와 자전거를 타고 키스를 하던 첫사랑의 여인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어느 지역이나 왕이 절대권력을 지닌 군주제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수동적이고 타의적이긴 하지만 소설에서 스테레오타입으로 정형화된 여성들은 여성독자인 내게 언제나 불만스러웠던 사항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소설은 장원두가 자신의 성장기에 영향을 준 여인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한 남자에게 모성과 정신적, 육체적 사랑의 추억은 자신을 지금의 남성으로 이루게 한 결정적 사건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전혀 상반적인 여성상을 모두 흠모해온 장원두를 보면서 인간의 이중, 삼중적인 욕망의 본질을 엿본 기분이었달까.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그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그는 폭력을 본질로 하는 왕이 될 수 없었다는 것. 그러므로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고 그의 인간됨을 어루만질 수 밖에 없어 가슴한구석을 허전하게 하는 그녀들, 여인네들도 영웅을 앞뒤에서 조력하는 인간이었다는 것, 그것만이 다행이었달까.

그 외 마사오와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들도 어느 만담가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구수한 옛날 이야기처럼 떡처럼 찰지고 꿀처럼 입에 철썩 달라붙는 묘미가 있었다. 끝내 용이 되지 못한 조창용, 박치기왕 용칠이, 빽다리 차백달, 메기 김영출, 민주투사 조봉신, 노름꾼 이희주, 최고의 문사 박조룡, 우주적 술꾼 정운천, 역술가 최고리, 천재화가 성문종, 황포파 황보춘, 있는 집 아들 조대경, 머리나쁜 의리파 희안, 하마 한상수, 재천의 오른팔 이중원, 왼팔 오재모... 이 작품은 ‘성석제’라는 범상치 않은 작가의 이름답게 인물의 개성넘치는 이름에서 시작해 구술적 이야기를 맛깔나게 빚어내는, 이른바 전통적 수사를 정통으로 발휘하여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소설이었다. 만약 부드러운 얼굴과 혀의 놀림 하나만큼은 지역에서 최고였던 박재천이 이 소설을 말한다면 그는 어떤 재주를 부렸을까. 누구보다 언론매체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있던 그가 시류에 따라 운좋게 살아남았던 뛰어난 언변으로 이 작품을 자신의 신화만들기에 이용했을 터. 그는 아마도 자신의 집에 관객만원사례를 불러온 TV속 명승부의 그날처럼 소설을 통한 우상화작업에 박차를 가하지 않았을까. 너무도 익숙해 누구라고 꼭 꼬집어 빗대기 힘든 우리네 수많은 정치인들의 어제 오늘처럼.

왕자(王者)와 왕좌(王座)사이

그런데 왜 하필 마사오였을까. 마사오는 출신성분도 불순하고 학력도 짧다. 청소년 범죄 및 군대 탈영이라는 국가반역죄도 있다. 배경과 지식, 이력 어디를 보아도 주먹을 제외하곤 왕이 될 만한 자격 및 조건은 전무해 보인다. 하지만 거리의 왕으로서 한번 찍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는 ‘표독함’과 한 번 걸리면 지구 끝까지 좇아가서 상대를 쓰러뜨리고 마는 ‘독기’하나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러한 ‘독종’의 기질이 챔피언이 아닌 도전자의 덕목이라는 것쯤은 지난시절 강대국을 상대하던 약소국의 국민이력으로 터득한 오래된 상식이다. 우리네 왕이 유일하게 내세울만한 무기는 마사오의 독기였는지 모른다. 또한 목표물을 향한 끈기와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이 다른 조건들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 탁월하여 지역민이 왕의 자격으로 수긍할 만했다는 것은 전사로서의 자질이 곧 왕이 되는 가장 큰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마사오는 지역사회에 혁혁한 공을 세울만한 대외적인 전투에 참가해 공을 쌓은 적도 없고 기껏해야 군대시절 스파링 파트너로 상대해준 세계챔피언에 맞아 죽을 뻔한 마지막 순간 불굴의 끈기로 날린 한방으로 그를 쓰러뜨린 해프닝 정도가 그가 내세울 만한 대전에 불과했다.(70년대 4전 5기 신화의 반영은 아니었을까) 어린 소년으로서 누이를 임신시킨 남자 성인과 대적해 낫을 휘둘러 그의 한 쪽 눈을 앗아간 일은 우발적인 상해사건으로 보였다. 사실 주먹을 쓰는 조직폭력배의 두목이 되기에 컨텐츠는 미약했고 공적이 얕았던 것이다. 스포츠 스타처럼 지역의 이미지를 드높이거나 자긍심과 용기를 안겨주는 영웅이 되기에도 뚜렷한 성과는 없어보였다. 한마디로 그는 비공식적인 지역세계에서 지역민들이 자체 구전한 여러 신화가 믹스되어 창조된, 만들어진 왕인 것이다.

그래서 마사오라는 영울을 만나러 가는 길은 굳이 ‘두목’이나 ’대장‘, 혹은 ’형님’, ’왕초‘를 찾는 길이 아니고 ’왕‘을 찾아서 가는 길인 것이다. ‘왕(王)’이라는 글자는 도끼의 모습을 딴 상형문자이다. 도끼는 선사시대부터 특별한 기능과 권위를 상징해왔다. 절대권력을 지닌 마을의 부족장은 나무를 베듯 도끼로 사람의 목을 내려칠 수 있는 존재아니던가. 남성중심의 농경사회에서 도끼를 곧 왕의 권력으로 상징화하였다는 실마리는 마사오 이후에도 동일했다. 마사오가 중풍으로 쓰러진 후 그의 실세가 약화되자 2인자인 재천은 어딜 가든 자신의 별명을 ‘도끼’라 자칭하며 도끼가 곧 자신임을 알리고 다녔다. 마사오보다 뛰어난 인물이 되고자 했던 창용은 ’도끼’로 마사오의 오른팔을 박살내며 그를 외팔이 신세로 만들었다. 두 사람 모두 마사오 이후 왕위쟁탈을 ’도끼’라는 별명과 도구로 동격화하고자 한 에피소드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는 곧 마사오가 왕이라는 권력자로서 ’도끼’처럼 생사를 손에 쥐고 있음을 의미하며 지역민은 왕에게 생사여탈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복종을 수긍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왕을 찾아서 가는 길은 도끼라는 왕의 본질, 폭력의 고향에서 현장검증을 수행하기 위한 길은 아니었을까.

장원두의 버스 탑승시간은 대부분 왕의 치하에서 친구들끼리 유혈의 저녁을 보냈거나, 치기어린 내기와 고집스런 대회를 일삼았던 추억을 회상하는 시간이었다. 여기서 마사오는 ‘내 팔뚝이 네 팔뚝보다 굵다’는 애매한 결과에 정확하고 공정한 재판을 담당했다. 마사오가 재판관으로서 자질이 있었다기 보다는 사람들이 공정한 재판을 해줄 왕으로 그를 원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이는 역으로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공정하지 못했다는 것의 방증이 아닐까) 사람들은 마사오가 쓰러진 후 마을에 나쁜 일이 생기면 여지없이 마사오의 공백으로 그 탓을 돌리고 사건, 사고의 종착지에 원인과 상관없는 마사오와 연결시킨다. 그는 지역민의 바램에 따라 ‘지역의 평온과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 재판관, 시장, 의원, 언론인, 배우’의 역할을 해온 멀티 플레이어였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타자로서 종교적 절대자의 위치에 가까웠다고 보여진다. 마사오는 국가에 반역죄를 짓고 웃통이 벗겨진 채 피를 흘리며 마을 행렬을 하였기로 흡사 예수처럼 지역민의 죄를 대신 짊어진 순교자의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서구 기독교가 인간 외부에서 신성을 찾아 절대적 초월자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는 종교였기에 (나약한 지역민은)마사오를 (외부적)신으로 여기고 지역민은 기꺼이 그를 따르는 신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차이는 신도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고 일반신도이냐 광신도이냐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마사오는, 마사오에게는 왕이 된 것이 행운이었을까? 아니 마사오는 진정 왕이 되고 싶었을까? 이 책에서는 재천이나 창용처럼 왕이 되고 싶어하던 마사오의 자발적 내적동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떠한 대결이나 쿠테타없이 자연스럽게 왕의 자리에 오른 마사오를 보면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왕의 자리이지 왕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본다면 지역민에겐 실물정치로 백성을 다스리는 왕자(王者)보다는 개념정치로 백성뒤에 앉아있던 왕좌(王座)가 더 중요한 게 아니었을까. 왕좌가 필요했기 때문에 왕자를 만든 것,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듯이. 흡사 마을입구의 천하대장군처럼 나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늘 마음속 든든한 지킴이로서 같은 자리에 군림하는 도끼같은 존재. 왕이 있으면 왕비와 왕자가 있고 공주와 시녀가 있어야 하는데 지역엔 왕(王)인 마사오와 왕이 아닌 신(臣)으로서 지역민만이 존재했다. 사람들 모두에게 마사오는 왕이었기에 지역민들은 기꺼이 왕의 절대권력에 복종하는 그의 신(臣)이 되는 것에 불만을 품지 않고 원초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혹시 마사오에 불만은 없었을까? 사람들은 미리 마련해둔 왕좌에 왕을 앉히기 위해 끊임없이 신화를 만들고 확대, 과장, 재생산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모습의 왕을 조형해 나갔다. 마사오를 부정하는 건 아마도 자기부정으로서 자기발등에 도끼를 찍는 일은 아니었을까. 마사오를 깊게 생각하자니 결국 그를 왕으로 만든 사람들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그들 사이 어디쯤엔가 나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사오의 부고를 인정하는 일은 그를 왕으로 만든 우리들 자신의 유고를 확인하는 절차였던 것이다.

인물은 저 혼자 인물로 나서 인물로 살다가 인물로 죽는가? 39p

이처럼 지역의 지킴이였던 마사오의 부고를 듣고 난 다음, 장원두는 무엇이든 누구든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주면 좋겠고 하나라도 걸릴 경우 그것들을 마구 흔들어 버리고 싶다는 무의식에 사로잡혔다고 고백한다. 이는 한 인물의 죽음에 대한 애도라기보다는 영웅을 숭배하던 집단 군중심리에서 개인으로 귀환하는 과정에 일어나는 심리적 아노미 현상으로 보고싶었다. 정확히는 왕자의 상실이 아닌 왕좌의 부재가 가져온 두려움이었다. 가만보면 사람들은 혼자서는 두렵기 때문에 영웅을 찾는 것이 아닐까. 집단 두려움의 연대가 영웅탄생의 배경이라면 개인 두려움의 인식은 영웅탄생의 계기가 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영웅은 두려움 없는 존재인가. 작가는 말한다. 완벽한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사람이 왕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이라고. 그것이 곧 두려움을 극복하는 결정적 이유가 되는 것이라고. 영웅의 두려움이야말로 자기개발에 필사적인 동기를 부여한다고. 마사오를 비롯해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마사오 신도들은 어찌보면 보통사람 이상으로 하나씩 두려워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들도 지식이나 체격, 외모, 집안, 언변에 있어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는 마사오처럼 어울리지 않게 주삿바늘을 두려워할 수도 있고 원두처럼 유난히 외로움을 못견뎌할 수도 있다. 태권도나 유도를 배우는 사람도 유난히 겁이 많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이처럼 인간에게 있어 두려움의 인식, 공감, 확장, 연대의 발전과정은 인간의 생존전략으로 오랜 세월 군림해왔다. 마을에 급작스레 닥친 쓰나미같은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사람들은 다시 지역을 앞세워 다음의 왕을 기다리는 것이다. 왕은 사라졌지만 왕좌는 영원한 것이기에. 마사오는 사라졌지만 두려움은 남는 것이기에.

또 하나, 이 작품이 화자인 장원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각이어서 그렇지 내겐 타자인 박재천이라는 인물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왕자와 왕좌의 사이에서 늘 배회하던 그였다. 왕자와 왕좌의 속성을 모두 파악하였다고 왕좌에 앉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제일 확률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5년 만에 만난 재천은 원두에게 길거리 청소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재천에겐 학교에서 친구의 눈을 실명케 한 리틀 마사오로서의 유사한 신화도 있었다. 협잡과 야합, 야비와 아첨의 기술도 상당했다. 마사오의 공백과 그로 생긴 집단 두려움, 호시탐탐 후계자를 노리는 지역의 2인자들 속에서 재천은 위기라는 호재를 生의 절호의 찬스로 만들기 위해 그동안의 모든 인맥과 능력을 동원한다. 다음의 후계자가 내세우는 아젠다는 언제나 지역발전, 지역개발이라는 명제가 아니던가. 재천은 오합지졸의 노병부대를 이끌고 쿠테타를 가장한 왕위등극을 자진 연출해내는 꽤 준비된 재주꾼이었다. 그는 드라마틱한 엔터테이너의 자질을 타고났다. 재천의 권모술수를 보면서 작금의 시대에 되도록 길게 살아남는 여느 정치인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들은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달라져도 끝까지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소신과 이념을 잘도 바꿔가며 2인자, 3인자로 생존했다. 하지만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는 교훈을 기억한다. 지역 모든 남성들의 로망이었던 세희가 지역마담으로 성장한 후 끝내 재천을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만의 하나 대통령이 된다 해도 어떻게든 처절한 몰락의 경로를 재차 밟을 것이라는 공감때문이었을까. 왕좌만 남고 왕자는 보이지 않던 소설의 마지막은 왕도 왕을 좇던 나머지도 모두 쓸쓸해지는 역사적 이별의 현장만 같았다. 이 책의 표지처럼 이제 무대는 막을 내렸고 덩그러니 황제의 의자만 남겨진 채 때마침 구슬픈 봄비는 추적추적 내려오고 뒤돌아 내 우산 챙기기에 여념없는 장이 파하는 시간. 헤어짐 그 후,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쿠오 바디스!, 원두에게 닥친 질문은 작가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질문은 아닐까.

쿠오 바디스!

이 소설은 마사오의 장례식이 끝나면서 이야기가 끝나는 구성이었다. 영웅은 죽고 나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한다. 하지만 계속되고 영원한 건 신화이지 영웅은 아닌 것이다. 한때 나마 영웅의 삶을 보며 가슴 설레었고 열광한 적이 있다하면 우리는 신화가 되는 꿈을 꾸면 되는 것이다. 꿈속의 영웅과 진짜 영웅의 차이가 있다하면 누가 영웅을 만들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이 소설이 영웅의 소설이 아니고 왕이라는 영웅을 만들어낸 영웅이 아닌 사람들의 소설인 까닭이 바로 여기 있었다. 다행히도 마사오가 죽었기 때문에 죽고 나서 원두의 막은 내렸기 때문이다. 지금의 왕이 죽은 후에 전개될 다음 왕의 더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아니고 실은 왕이 죽기까지 알고 보니 왕을 만들어 온 나의 이야기였다는 것. 그러니 앞으로도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것. 그것만이 내겐 왕자보다 더 반가운 한줄기 서광이 비치는 광자의 뉴스였다. 즉, 소설에서 중요한 건 이제 왕이 아니고 그의 죽음을 목도한 왕이 아닌 화자이자 우리인 것이다. 영웅의 몰락은 연민을 부르고 영웅의 죽음은 울분을 유도한다. 우리는 영웅을 통과해낸 바닥에서 자기미련으로 시작하여 자기반성, 자기성찰의 반등을 경험한다. 이 소설은 마사오의 일대기를 상영하며 그의 죽음 이후, 즉 영웅 사후의 문제를 우리에게 넌지시 질문하고 있다. ‘왕을 찾아서’ 가는 길은 이제 왕 없이도 혼자서 자기인생의 ‘왕이 되는 길을 찾아서’ 나서는 일인 것을 가만히 가르친다. 내 지역의 왕이 아닌 내 인생의 왕을 찾는 것이 짐짓 막연해보였는지 작가는 힌트를 준다. 그건 어떻게 죽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라고 말한다. 과거 내 영혼의 창고지기를 왕의 무덤에 묻고 내 일생을 향해 나아가는 쪽은 희뿌연 비안개의 장막을 넘어 황금햇살이 비치는 쪽일 것이라 눈짓한다. 짖궂게도 장례라는 범상의 현장에서 평범한 일상의 현장으로 복귀하게 될 우리에게 그곳은 어디냐고 어디를 가느냐고 되묻는 것이다. 쿠오 바디스 !, 왕이 되는 길을 찾아서.

우리는 걱정한다. 원두처럼 늘 중요한 순간에 머뭇대며 주저하다가 일도 사랑도 놓쳤듯이 이번에도 스스로 선택이 아닌 상황에 내몰려 막다른 결정을 하게 되면 어쩔 것인가. 원두가 고향을 떠났다가 잠시 귀향한 이유는 마사오의 공식적인 죽음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가 추억을 부활시키며 과거의 영토에서 조우한 것은 마사오가 아니라 왕의 신화에 묻혀버린 비공식적인 자신의 상처였다. 이제 왕은 떠나고 무덤만 남았다. 왕(王)은 애석하게도 늘 왕(往)이라는 과거가 된다. 왕은 늘 도끼라는 폭력과 함께 묻혀졌으므로 원두에게 도끼가된 친구와 사랑이라는 폭력도 같이 묻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스스로 왕권을 교체하며 신화를 갱신해야할 원두의 숙제앞에 우리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자기 영웅을 개발하고 자기 삶의 왕이 되는 것은 분명 고단하고 힘겨운 여정일 것이라 위로할 것인가. 때로는 절망스러워 고독함에 무릎을 꿇을지도 모른다 젠 체를 할 것인가. 당신이 자라온 영토를 떠나면서 지난 시절 마음의 영토를 등지면서 새롭게 한발을 내 딛는 그곳에 당신의 영웅은 비로소 잠깨기 시작할 것이라 예언 할 것인가.

어쩐지 나는 그에게 새로운 왕을 찾으라 응원하고 싶지 않다. 잊지 말자. 신화속 영웅이 신적인 권능을 가졌다손 치더라도 영웅은 결국 인간이었고 끝까지 인간이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영웅을 만드는 일이지만 다 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영웅을 좇아왔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인간인 원두가 외부 세계의 왕이 아닌 자기 내면의 왕을 찾아야 한다고 정답같은 충고를 하고 싶지 않다. 라캉은 말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고. 인간 존재와 생각의 불일치를 말하는 라캉의 분석은 원두의 현재 심리상태를 잘 설명해주는 듯하다. 원두는 왕이 아닌 이곳(현실/도시)에서 왕이 있는 그곳(과거/고향)의 생각을 하였기에 왕이 있었던 그곳에서 아직 존재하는 것이다. 그가 왕이 아닌 이곳에서 존재하는 방법은 그곳의 왕을 버리거나 이곳에서 자신의 왕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왕이 죽었기 때문에 원두는 자신의 존재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원두는 꼭 왕을 찾아야 하는가. 원두가 자신이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는 방법은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인가. 궁금하다. 그는 이제 왕이 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애초부터 왕이 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그렇기에 지금 무엇이 되고 싶은 건지 전혀 모를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을 찾아 그것을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자기 生의 왕이 되는 길은 아닐까.

이 책때문에 나는 나조차도 왕이 되고 싶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실은, 왕이 되고 싶었다. 아니 왕이 되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내가 속한 분야에서 실력으로는 항상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었다.(고 생각했다) 실력이 아닌 것들로도 왕이 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하지만 실력을 겸비한 왕은 자리에서 내려 앉더라도 실력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일단 왕이 되면 누구라도 그는 왕이라는 실력행사에 적절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앉은 왕은 어떻게해서 거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연히 왕이 된 마사오가 우연히 사라지는 것처럼. 왕의 탄생이유는 왕의 몰락이유와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라 생각했다. 그런데, 왕은 정말로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책을 읽어낸 지금 막다른 질문에 멈칫하게 된다. 내가 되고 싶어했던 왕은 실은 과거 타자들이 욕망하던 왕의 아우라는 아니었을까. 혹시 최고의 실력자로서 왕이 아니라 왕의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원한 것은 아닐까. 돈이나 명성, 권력과 추종자들, 왕이었다는 기록, 그리고 왕권교체 이후 전관예우같은 대접...이런 달콤한 것들 때문에 왕을 욕망했던 것은 아닐까. 왕이 되지 못한 자들은 언제나 왕보다 많다. 왕을 찾아 나서다 보니 왕이 아닌 사람들 틈에서 결국 나를 찾아 나서게 된 이 작품이 오래 기억날 것 같다.

신화가 생산하는 내러티브는 집단을 동일한 정체성으로 연대하도록 유도한다. 그 집결력의 에너지는 이토록 중독성이 강하다. 생각만으로도 현실의 보상이 이루어지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그곳에 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건 왕을 찾아 나서기 이전에 내가 찾아야 할 것이 왕인지를 먼저 인식하는 일이었다. 내가 좇아왔던 것을 왕이라 말하고 싶었던 욕심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무엇이든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찾아나서는 길은 결국 자기인생의 왕이 되는 길로 연결될 것이다. 이제야 왕을 찾아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는 기분이다. 바다에 물고기가 없을지 몰라도 낚시줄을 던지는 어부의 발걸음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오늘이다. 평생 정의를 찾아 나서는 길만이 정의로운 일인 것처럼 어쩌면 인간은 죽을때까지 진정한 자신을 찾아서 나서는 길만이 인간이라는 왕이 되는 길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기나고 긴 여행길이 그다지 두렵고 외로울 것 같지 않다. 그건 아마 당신도 인간이라는 연민이자 나도 인간이라는 공감에서 시작한 우리네 나란한 발걸음일 것이다. 다시 묻는다. 쿠오 바디스 ! 이제 찾는 것은 ’나’ 하나이지만 가는 것은 ’우리’ 함께이어도 좋겠다. 나는 나의 길을 찾아 왕이 되고 당신은 당신의 길을 찾아 왕이 되는 일이 ’밝고 어두운 세상 모두에게 공평하게 설치된 망원경’처럼 기다려지는 오늘, 다시 왕이 되어보고 싶다는 꿈을 꾸어본다. 그래, 왕이 되는 길을 찾아서, 그곳으로 가고 싶다. 그건 그토록 반가운 나만의 자랑스런 인간이 되는 길, 그래서 누구나 나설 수 있지만 아무나 다다를 수 없는 길, 그렇기에 우리 진정한 꿈이 되는 길, 살면서 꼭 한번은 가보고 싶은 목메이게 벅찬 길이 아닐까. 그 길에서 만난 우리들이야말로 서로 최고인 채로 당당한 왕자(王者)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