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소설에서는 한동안 명랑한 어투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던 공지영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라는 에세이를 쓸때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온 나라가 촛불로 밝혀지던 와중에도 정말 가볍고 사소한 주변이야기만을 쓰겠다는 약속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 공지영이 아니었다. 대신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회의 불합리와 야만성을 고발하는 공지영이 있었다. 

골리앗을 상대로 이긴 싸움을 한 것은 다윗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청각장애인에 미성년자이기까지 한 아이들을 상대로 인간의 존엄을 무참히 짓밟는 야만을 저지른 이들에게 그에 합당한 벌을 주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사회의 모습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우연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듯 했다. 이것이 소설속의 사회에서만 있는 일이라는 정말 다행이겠지만 소설이라는 허구속에 담긴 삶의 진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그렇게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국내 최대기업인 삼성의 비리와 집행유예로 끝난 재판,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무고한 시민을 무참히 짓밞은 군부독재 주체들의 사면, 노예계약과 성접대 강요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간 이들에 대한 수사의 미적거림, 제자를 성추행한 교사보다 일제고사에서 아이들에게 시험에 대한 선택권을 준 교사가 더 큰 징계를 받는 현실, 정부의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에 대한 탄압과 전문대 출신이라는 학력주의의 잣대를 들이대는 일부언론들의 모습 등등...
사회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무렵의 많은 이들은 세상은 정의로워야 하고 정의로울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이상을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 이상과 믿음을 떠받칠 힘은 가정을 꾸리고 생계를 책임지는 위치에 서게 되면 여지없이 빠지고 만다.

p.227
"왜 세상에서는 착한 사람이 맞고 고문당하고 벌받고 그리고 비참하게 죽어가나? 그럼 이 세상은 벌써 지옥이 아닐까? 대체 누가 이 질문에 대답해줄 것인가? 누군가 그러더라. 엄마였던가, 선생님이었던가, 아님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다른 목사님이셨던가······ 아니면 그 사람들이 모두 그랬던가, 열심히 공부하고 그래서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라고. 그리고 나도 그 말을 믿었지. 그런데 얼마전, 자애학원 사건을 접하면서 나는 깨닫게 된거야. 어른이 되면 그 대답을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어른이 되면 그 질문을 잊고 사는 것이라고 말이야." 

나도 아직까지는 세상은 보다 정의로워야 하고 정의로울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비록 언제까지 그 믿음을 지킬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지만 서유진과 강인호 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믿기에, 나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p.210~211
-연두야, 이제 네 차례야. 그래, 선생님이 솔직히 말할게. 이거 어려운 싸움이야. 진실은 말이야, 그걸 지키려고 누군가 몸을 던질 때 비로소 일어나 제 힘을 내는 거야. 우리가 그걸 하찮게 여기고 힘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힘을 잃어. 연두야, 네가 용기를 주어야해. 진실에게 그리고 유리에게······넌 할 수 있어. (강인호)

p.227
"이제 나는 정말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 그렇지 않다면 내 아버지의 삶도 연두와 연두 아버지도 너도 나도, 우리의 삶은 정말 꾸드러빠진 떡조각 처럼 무의미해질 거야. 가난한 것도 두렵지 않고 고통도 그리 무섭지 않다. 내게 가해진 모든 평판들 소문들도 자기네들끼리 실컷 지껄이라지 하지만 의미가 사라지는 것, 뭐랄까, 우리의 삶이 그냥 먹고 싸는 것, 돈을 모으고 옷을 사고 하는 그 너머의 무엇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나는 확인하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살아가는 걸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강선생." (서유진)

타인의 아픔에 자기가 가시에 찔린듯 아파하는 작가 공지영. 나는 그녀가 말하는 아픔이 타인에 대한 애정과 연민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아픔에 함께 아파할 줄 아는 공감의 능력이 그녀만의 소설을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지면서도 희망의 숨통이 트였다. 나는 지금도 공지영의 열렬한 팬이지만 앞으로 더욱 열렬한 팬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