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올 봄, 문학동네 카페에서 미리 연재되던 '미출간 연재분'일 때 읽어본 기억이 있다. 비록 그 연재분을 열과 성을 다해 끝까지 지켜보지는 못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몇 화만 읽고 말았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그 중 1화는 정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파킨슨 병을 앓고 있는 80을 바라보는 '아내'가 숨이 멎은 자신의 '남편'을 곱게 단장시켜 내일 심기로 한 '매화나무' 아래에 묻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시체유기'의 현장인데 참 예쁘게 그려져서 더 기억에 남아 있다. 이 이야기는 스릴러인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화로 넘어갔던 기억도 그대로 살아났다. 그런데 책으로 만들어 질 때 순서를 바꾸지 않아서 그 1화가 여전히 <당신>의 맨 처음에 등장한다. 책을 열어 첫 페이지를 읽어 본 후 '아, 이 책이 그 연재분이구나'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박범신이라는 작가는 이름만으로도 읽어봄직한, 큰 작가이다. 흔히 네임벨류라 하는 것이 그에게는 있고,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 중 하나다. 나도 그의 책이라면 믿고 한 번쯤은 보게 되는 것 같다. 나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그의 책은 늘 기대를 받는다. 그것이 부담이 될 법도 한데, 이번 책 <당신>도 예의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섬세했고, 덤덤했으며, 그러면서도 아픔이 한켠에는 자리잡고 있는. 한 가정의 이야기이지만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 어찌보면 책 속에서 풀어 나가는 기본 줄거리는 우리나라에서는 엄청나게 흔하고 익숙한 이야기이다. 엇갈린 마음, 자신의 아이가 아닌 자식을 거두는 남편, 전남자를 잊지 못해 남편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아내. 막장 드라마가 난무하는 지금같은 시대엔 소소한 이야기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 단편적인 이야기가 '노년'이라는 단어와 '치매'라는 병, '속죄'와 '용서', '치유'가 만나면서 새로운 느낌으로 다시 태어났다. 흔하디 흔한 이야기를 한 순간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야기로 만드는 건 결단코 작가의 역량이겠지만 말이다.

 

<당신> 속 주인공이자 화자인 아내 '희옥'은 남편 '호백'의 생전, 그러니까 그의 기억이 온전할 때는 그를 마음껏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아니 사랑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치매란 병을 앓기 시작한 후 얼마 뒤 호백이 무너져 내리며 도와달라며 안겨들던 고백을 들으며 희옥은 그를 사랑하게 됐다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용 전체가 남편에게 보내는 아내의 가슴 절절한 속죄와 미안함, 그리고 사랑의 이야기들 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더불어 굉장히 헌신적이었던 호백의 일방적인 사랑 또한. 리뷰의 제목으로 '가슴 먹먹한 남편 전 상서'라 이름을 붙인 까닭이다.

 

이해하기는 힘들다. 누군가를 이렇게나 일방적으로, 오랫동안, 참으면서 곁에 둘 수 있는 것일까. 희옥은 책 초반 남편인 호백을 시종이나 다름없었다며 이야기하곤 했다. 어찌되었건 지나간 옛 남자 때문에 자신의 가정까지도 버렸던 그녀에게 고작 '다녀왔냐'는 말을 하는 호백을 보면 말이다. 호백의 사랑은 진득하고 오래되었던 만큼이나 깊었고, 그 깊이는 새삼 희옥이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이었다는 것이 계속 드러날 때마다 '호백의 사랑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 치매라는 증상 때문에 뜬금없이 과거로 홀로 돌아가 현재의 희옥에게 쏴 붙이는 모습을 보면서는 외려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소설 속 희옥 또한 그의 그런 행동들을 처음에는 전에 없던 일이라 낯설어했지만, 계속 사랑으로 감싸 안았고 말이다.

 

치매라는 병을 동기로 내뿜어지는 과거의 기억들, 호백이 생전에 희옥 몰래 쓰던 일기장 속 숨겨진 호백의 기억들, 희옥의 시선에서의 기억들이 하나로 얽혀드는 이야기를 그리면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묻는 듯 했다. '도대체 사랑이 무어냐'고 말이다. 호백은 자신이 다쳐도 함께 있고 싶은 사랑을 했던 것 같다. 청매 꽃가루로 인해 실신까지 할 정도여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이 바라만 봐야 하는 나무임에도 청매꽃을 좋아했던 것은, '저 나무는 당신과 나 같소' 라는 자신과의 동질감 때문이었던 듯 했다. 희옥의 사랑은 마음을 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던지는 타입이다. 치매에 걸린 호백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옛남자의 비보를 듣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하지만 작가가 생각하는 사랑은 '당신'이라는 단어 속에 있는 듯 했다. "가슴이 마구 무너진다. 당신, 이란 말이 왜 이리 슬플까. 함께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이다. 그늘과 양지, 한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더께로 얹혀 곱삭으면 그렇다, 그것이 당신일 것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기가 힘든 책이긴 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다가도 정리가 잘 안되기도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만큼 뭔가 묵직하게 남는다. 남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덧붙임)

보라색과 푸른색 그 어디쯤. 책의 표지를 벗겨내면 속 안의 책을 둘러싼 두꺼운 겉표면의 색깔이다. 표지 속 <당신>이라는 책 제목을 나타내기도 하는 이 묘한 보랏빛은 이 소설이 가지는 느낌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 하다. 조금은 덤덤하지만 꽤나 격렬하고, 순수하지만 그와 다른 광기의 모습을 이미지화 한 색감으로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할까. 사실 책에 등장하는 '청매'가 이런 색일까 싶어 폭풍 검색을 해 봤지만 닮은 색깔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매꽃은 백색이었다.) 누구의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 책의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당신, 박범신,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