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지독한 늪의 찐득함.

  책을 펼치는 순간 나도 모르는 땅에 한발짝 발을 내밀었다. 한걸음 더 내밀기 위해 발을 띠었으나 발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지독한 늪의 찐득함 때문인지 더 이상 발걸음을 내 딛지 못하고 오롯하게 그 곳에 서 있었다. 지독하고 아득한 늪의 숲에서.

이야기를 좋아해서 소설을 즐겨 읽지만, 그래서 더 문학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다보니 사람의 얼굴이 각기 다른 것처럼 소설에 쓰여지는 인간의 모습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삶을 살고 있어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와 다른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게 만든다. 일종의 간접체험이지만 그 속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체감할 수 있어서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소설을 읽게 되는 것 같다.

정유정 작가의 책은 <종의 기원> 이전에 <내 심장을 쏴라><2009,은행나무>를 통해 처음 만났다. 그 때도 그녀가 쓴 작품을 읽으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종의 기원> 역시 지독한 늪을 걸어가는 것처럼 마음 편히 그녀의 작품 세계를 유영하지 못했다. 7년전 그때보다 더 <종의 기원>은 독하고, 텁텁하다. <종의 기원>은 한 인간의 면면을 현미경처럼 내다 보며 악의 모습을 날것 그대로 다 보여줌으로서 악이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지를 잘 그려내고 있다지만 이 책을 나는 그녀의 방식이 너무나 거칠것 없이 그려내고 있어서 불편했다.마치 범죄 영화나 매일 뉴스에서 나오는 잔인한 범죄를 다시 마주하며 소설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한 남자의 범행현장을 들여다 볼 수 밖에 없었다.

유진의 의식과 행동을 통해 작가가 그리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우리의 내면의 무의식 사이에서 주는 사이코패스의 극강을 보여주는 펀치였다면 굳이 소설로서 다시 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물음이 밀려온다. 요즘 티비를 틀면 현실 속에 일어나는 나쁜 뉴스들이 즐비하게 쏟아지고, 현실 속에서도 그런 일들이 자행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모습들을 너무나 자주 보다 보니 그런 뉴스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절로 피곤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런지 한유진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가 살아오면서 느낀 악의 근원과 본성, 악의 깊이를 다루기 위해 작가는 하나하나 블럭을 쌓아갔지만 그가 왜 무의식적인 짐승을 풀어놓을 수 밖에 없는지 이야기를 풀어감에도 하나도 공감하지 못했다. 그가 살인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이유. 한 인간의 망각. 좀처럼 이해 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들이 부유하게 떠 다녔을 뿐 그 어떤 것에도 감정적인 공감대를 느끼지 못했다.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을 떠올리기 전에 <종의 기원>하면 절로 다윈이 떠오른다. 깊은 심연 속에서의 인간의 본성. 그 심연의 깊이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악질적인 살인. 더 강하고, 더 잔혹한 리얼리티. 추리소설이나 스릴러 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이야기의 쾌감이 더 강한 것을 보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님을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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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지 않아요. 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 p.67

'네가 떠밀면 너도 떠밀리는 게 세상 이치야. 떠밀지 않고 떠밀리지 않는 게 정답이야.'

정답대로 살아왔다고 사진한다. 지금껏 시중쥐 한 마리 떠밀어본 적 없었으니까. 어니에게도 눈이 있는바, 그 점을 잘 알거라 믿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왜 그랬을까. 어젯밤, 나를 시궁쥐처럼 시궁창으로 떠민 이유가 뭘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이유 중 그 어떤 것도 '모든 것'을 설명해내지 못했다. - p.125

돌이켜보면 지난 10년 동안, 어머니에게 해진은 해진이 아니었다. 유민 형이었다. 당연히 어떤 비밀을 말해주는 것도 가능했겠지. 다만 해진도 그게 가능한지가 문제였다. 녀석으로 말하면, 걸어다니는 X-ray였다. 속내를 감추는 게 불가능한 놈이었다. 어머니가 뭘 말해주었든, 비밀은 지켜지지 않았을 것이다. 놈에게 있어 나는 진단방사선과 의사였으므로. 오늘 녀석 에게서 읽어낸 판독 결과는 이랬다.

아무것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