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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추억들.

결혼을 앞두고 여자의 마음은 싱숭생숭 한걸까? 서른 세살 유리코는 결혼을 앞두고 장롱 속에 고히 간직해둔 물건들을 눈 덮힌 산 속에 버리려고 올라갔다가 사고를 당한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현실에서 곧 남편이 될 남자친구가 아니라 대학교 1학년 때 사귀었던 남자 친구의 생일날이었다. 사랑의 앨범이 촤르륵 펼쳐지듯 그녀가 사귀었던 남자들과 함께 그 순간의 시절로 돌아간다. 그녀의 사랑의 편력은 각 시기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대학교 시절에 만났던 사람, 고등학교 때 만났던 첫사랑, 직장 상사와 불륜등 다양한 양상의 사랑이 그려지지만 그녀 마음 속 깊이 꼭꼭 숨겨둔 사랑은 고등학교 때 첫사랑이었던 에이였다.

그 시절에는 혼자 있는 거만으로도 의미 없이 불안해지곤 했지, 하며 스물다섯 살 무렵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냥 수다를 떠는 남녀만 봐도 마음이 흐트러졌다. 사랑의 아픔은 짝사랑과 실연에만 있을 뿐 사랑하는 상대가 사랑해 주기만 하면 그걸로 행복하다고 믿던 무렵의 자신이 미숙하게 여겨졌다. 그와의 사랑이 달콤해질수록 마음 속에서는 독이 퍼지고 하나의 마음이 둘러 찢어졌다. 이대로 계속 폭풍 같은 시간이 계속될까 생각하면, 지금까지 해 온 사랑은 사랑 비슷한 것일 뿐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자기 연민에 빠졌다. 게다가 그와의 사랑이 끝나도 불안한 이 감정은 마음의 상처로 남아서 계속 짊어질 수밖에 없는 걸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일은 과거가 되고, 잦아들지 않는 폭풍은 이 세상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아 버렸다. 그것이 수업료가 비싼 공부였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 p.35

지나가는 바람이 내 마음에 생채기를 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이 낸 상처는 사람으로 아물기 마련이다. 그러나 유리코는 왜 결혼을 앞두고 마치 타임슬립을 거쳐 현실이 아닌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갔을까? 많은 사랑의 흔적들 사이에서 아직도 마음 속에 녹히지 못한 첫사랑 에이와 다시 재회 했다가 다시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에이의 모습들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에이와 비슷한 면면을 갖고 있는 가노와 사귀게 되었고 연애의 좋은 결말로 치닫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사람인 에이가 늘 곁에 맴돌았다.

안 그래도 사랑은 늘 타임슬립과 가까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잘 풀리는 사랑은 그와 그녀의 시간이 정확히 겹쳐진다. 반면 잘 풀리지 않는 사랑은 양쪽의 시간에 차이가 생긴다. 같이 걸어갈 생각이었는데 상대보다 앞선 시간을 걸어가는 걸 알아차릴 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자기만 뒤처져 버릴 때도 있다. 비행중인 항공기가 함정에 빠진듯이 하강하는 것을 빗댄 사랑의 에어포켓에 빠진다는 표현이 있다. 그것도 타임슬립 같은 걸까. - p.68

사랑을 시험에 빗대는 것 잘못이다. 시험이라면 거듭할수록 자연스럽게 실력이 붙지만, 사랑은 반복한다고 실력이 높아지는 게 아니다. 똑같은 실수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 버리는 까닭은 내가 바보이기 때문이다. - p.78

한 장의 빛바랜 사진 같은 노래. 누구에게도 들려줄 수 없는 노래. 만약 유리코가 에이와의 좋은 결만을 맺었더라면 니시다 도시야의 '러브 히스토리'라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는 두 사람을 엇갈리게 했고 너와 나 사이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다시 타임슬립으로 돌아가는 '과거' 뿐이다. 오래된 사랑이자 나의 첫사랑. 내가 마음을 다 해 준 사랑의 끝이 씁쓸하기 그지없어 너무도 아픈 손가락이 되었지만 유리코는 다시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갔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을 맺는다.

과거로 돌아갔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가며 새 사람과 새 시작을 꿈꾸는 유리코. 어쩌면 그녀에게 남아있는 마음의 짐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서 사랑하는 이들과 만남으로서 마음에 걸리는 감정들을 하나둘씩 녹히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감정의 찌꺼기를 모두 걸러 버리고 다시 가노 앞에 선 유리코는 그 어떤 이보다 출발 선상에서 가볍게 한 발을 내 딛을 수 있는 마음을 안고 출발하지 않았나 싶다. 아련했지만 과거에서 다시 현실로 안주해서 돌아온 주인공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현실적이면서도 조금은 더 여운이 짙은 이야기로 끝맺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던 소설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졸업하고 이 노래를 만났다. 유키코에게는 이 노래가 그의 졸업 사진으로 자리 잡았다. 이 노래를 들으면 마음속 인화지에 그의 얼굴을 떠올리 수 있었다. 졸업 사진은 세월과 함께 빛이 바래지만, 마음속에 찍힌 사진은 노래의 빛을 받아 언제까지고 변함없이 반짝였다. 그런데 유키코는 그때 평상시처럼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말을 건네듯 흔들리는 버드나무 아래를

지났던 길조차 이제는 그저 열차에서 바라볼 뿐

그 시절의 삶을

당신은 잊지 말아요

당신은 내 청춘의 모든 것 - p.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