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내지 않는 감정의 응축, 누군가의 여자사람을 그리다.

 

 몇 달전 부터 하루도 빼지 않고 일기를 쓰고 있다. 어떤 일을 계기로 펜을 들고 그동안 쓰지 않았던 많은 여백이 남은 노트를 펼쳐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 공간에 나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하루의 날짜, 날씨, 혹은 하루의 있었던 일들, 그 시간에 있었던 나의 감정들이 녹아들어갔다. 그것은 누구도 터치 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이었다.

 

때로는 말이 꼬이는 것처럼 글이 꼬이기도 했지만 내가 보는 시선들이 빼곡하게 노트에 적혀나갔다. 누군가 보는 것은 아닌데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시선에 말미암아 글을 적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했지만 누군가에게 풀어놓지 않는 나만의 안식처였다. 아마도 허공에 대고 중얼거리는 말처럼 손으로 손수 쓰는 글은 쓰는 와중에 조금씩 농도가 줄어들 수 있지만 나에게 있어 그 공간은 내가 풀어놓는 응축된 감정을 가두어두는 곳이다.

 

앞으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읽어버렸다. - p.110

 

백 페이지 남짓한 이 책은 제목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일기를 쓰듯 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 여자, 나의 어머니의 죽음에서부터 그녀는 담담하게 혹은 지친듯 응고된 감정의 덩어리를 스스럼없이 적었다. 자전적인 시선들. 때로는 걸러내어야 할 것도 아니 에르노는 그녀의 시선 그대로 담아 놓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느끼도록 해준다. 그 어떤 책보다 더 당혹스러웠다. 스스럼없이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조차도 글을 쓰는 딸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글은 한 남자의 부인이 아닌 아이들의 엄마가 아닌 한 여자를 그리고 있다. 지구상에 태어난 한 여자의 삶을. 사람의 기억은 때로 그 사람이 생각하는대로 망각한다. 있었던 일 조차의 층위 조차도 분별하지 못할 때. 그녀의 글은 일기를 쓰는 것처럼 읊조리다가도 때로는 메모지에 메모를 해 놓은 것처럼 간단하게 그 일을 적어놓기도 한다. 어떤 형식 없이 자전적인 요소를 담아 담백하게, 묵직하게 그녀의 글을 담은 것이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다.

 

사뿐한 발걸음이 아닌 묵직한 걸음으로 여자의 일생을 이야기한다. 누군가의 여자사람을. 응축된 감정이 때론 무겁게 느껴지지만 그녀의 글은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묵직하게 잡히는 그런 책이기도 하다. 지금이 아닌 세월이 조금 흘러 다시 <한 여자>를 접한다면 조금 더 아니 에르노가 그리는 그것이 만져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여자의 진하고 진한 이야기는 충격과 당황을 넘어선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요소들이 담겨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