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박민우는 영산읍 출신의 서민이다. 온 가족이 서울로 야반도주를 했고 산동네 달골로 이사왔다. 방에는 창문이 없고 집에는 변소조차 없는 그런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해산물을 팔았고 교통사고 후 다리가 불편해진 아버지는 남은 해산물로 어묵을 만들어 팔았다. 제법 어묵이 팔렸기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부부는 어묵장사를 하게됐다. 박민우는 그 산동네에서 오직 두명만 있는 고등학생중의 한명이어서 사람들은 '학생집'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고등학생은 국수를 만들어 파는 집의 딸 차순아였다. 박민우는 그 동네를 휘어잡고 있던 재명이 형과 그의 형제들과 적당히 어울렸고 차순아는 그 동네 남자아이들이 모두 좋아했다. 박민우와 차순아는 등하교길에 자연스럽게 만나고 조심스럽게 함께했다.

 

  강연을 마친 박민우에게 어떤 여자가 다가와 쪽지를 건네주고 사라진다. 예전부터 잘 아는 분이라고, 꼭 전화해 달라고 했다면서. 그 쪽지에 쓰인 이름과 전화번호를 바라본다. 그는 어느새 건축가로서 성공했고 결혼했으며 성인이 되어 결혼한 딸이 있었다. 딸은 유학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해 자연스럽게 눌러앉았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내는 딸을 찾아가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더니 이제 아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고향친구였던 윤병구는 건강이 나빠져 쓰러졌고 암투병중인 건축가 선배는 남은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어느쪽에도 깊이 관여하지 않고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게 된 박민우의 일상에 차순아가 들어왔다.

 

  비록 나도 호화롭게 살아오진 않았지만 태어난 시대가 달라 책 속의 이야기들은 옛날 영화속의 그림같이 낯설었다. 언젠가 <봉순이 언니>를 읽고 있으니 지나가던 주임님이 표지를 슬쩍 들춰보더니 아련한듯 웃으며 그땐 다들 그랬다고 한마디 하고 지나갔다. 내게 아빠뻘인 그에게 책속의 옛날 풍경이 자신의 것과 같았음을 그 얼굴, 목소리에서 알았다. 나는 그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책을 읽었다고, 눈앞에 그림이 그려진다고 이제 나도 그때를 안다고 말하는건 감히 해서는 안될 일같았았다. 그리고 이 책도 그런 시선으로 곁에서 입을 닫고 눈으로만 가만히 쫓아가야했다.

 

  뜨거운 열정도 한풀 사그라들어 조금만 있으면 흩어져버릴것만 같은 노을빛 배경에 무엇하나 분명한것 없이 그저 바쁘게만 겉는 사람들의 그림자 사이로 갈곳을 잃은듯 구부정하게 서있는 한 남자가 있다. 지금껏 당연한듯, 당연해야 한다고 다그치면서 걸어온 그동안의 길과 일상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방향을 잃은듯 혼란스러워하고 있는것만 같아 보였다. 아마 책속의 박민우가 아니었을까. 예쁘고 젊은 모습만 기억하고 있어서 나이들고 뚱뚱해진 모습으로 차마 나타날 수 없었다던 차순아가 전하는 그리운 시절의 이야기는 박민우에겐 어제처럼 생생하면서도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본 박민우는 그런 일탈조차 잠깐의 해프닝으로 여기고 다시 당연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올 사람이었다. 해질 무렵이라는 제목이 주는 그 쓸쓸함을 가장 자연스럽게 온몸으로 휘감고 있는 사람이 그로 보였다.

 

  저자인 황석영은 개인의 회한과 사회의 회한은 함께 흔적을 남기지만, 겪을 때에는 그것이 원래 한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고 했다. 차순아의 글과 박민우의 기억을 통해 각자의 회환과 서로 다른위치에서 겪은 사회의 회환을 저자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이야기로 만들어 보여주었다. 한번도 한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한동안 멍하게 앉아있었다. 어느새 중간세대에 끼어버린 덕분에 생각이 많아진다. 입을 닫고 귀만 열어두고 싶은데 나도 모르게 어설프게 박민우가 되고 차순아가 된것처럼 착각하려고 해서 헛헛한 웃음이 새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