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강줄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어쩌다 100년 전 강의 풍경을 담은 사진을 보게 됐는데, 100년이란 시간의 틈이 믿겨지지 않을만큼 강은 지금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우주의 모든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리에 가장 잘 순응하고 있는 것이 강이다. 따라서 지금 보고 있는 '강'은 결코 예전의 그 '강'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화무상한 강이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학창시절 국어 시험에서도 '강'의 함축적 의미를 묻는 문제는 단골 손님이었다. 이육사의 '광야'에서 강물은 우리 역사였고, 신석정의 '어느 지류에 서서'에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었으며, 이 책의 제목과 인연이 있는 '공무도하가'에서는 강이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도 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강의 속성을 담고 있어서 그런지 시인들이 풀어놓은 강의 의미도 이렇듯 다양했다.

 

시인들처럼 문학적 의미까지는 아니지만, '강'이 내게도 그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아파트 분양광고 업무를 할 때 부터다. 그 전까지 내게 '강'은 그냥 '강'이었다. 그러나 아파트 분양광고에서의 '강'은 제품 컨셉을 좌우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특장점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강변의 전망 여부에 따라 실제로 분양가는 몇 억원씩 차이가 났고,  '강'과의 인접성이 돈 되는 아파트의 필수 조건이자 프리미엄의 상징이 됐다. 일찍이 김소월 시인은 지금의 분양 시장에 대한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던 것인지, 그가 노래한 '엄마야 누나야 강변(江邊)살자'란 구절은 현실이 되어 도시의 강변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고 이제 '강'은 부(富)의 혜택으로 변화하고 있다. 문학적 감수성이 파고들 새도 없이 자본주의의 현실이 '강'을 지배하게 되어 씁쓸하지만, 이 현실을 김 훈 작가도 굳이 따뜻하게 포장하지 않은 채 냉기가 흐르는 '강'의 현실 그대로를 <공무도하>라는 작품에 옮겨 놓았다. 이 작품을 통해 나는 지금껏 내가 바라보던 '강'과 김 훈 작가가 바라보는 '강' 사이에도 또 다른 강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 소설로 명성을 얻은 김 훈 작가의 현대 소설 <공무도하>는 '공무도하가'의 강이 지닌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경계'라는 의미를 버리진 않았다. 대신 김 훈 작가만의 해석으로 새로운 '공무도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무도하>의 차안(此岸)이 지금의 현실이라면 피안(彼岸)은 이 현실을 벗어난 세상을 말한다. 그것이 '공무도하가'에서처럼 생과 사가 될 수도 있지만 작가는 죽음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변화의 경계까지 모두 아울러 '강'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키우던 개에게 물려 죽은 소년이나 공사장 중장비에 깔려 죽은 소녀와 마찬가지로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한 장철수, 오금자, 후에, 박옥출, 방천석 등도 그들 나름의 '강'을 건넌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들의 이야기를 신문사 사회부의 '문정수'기자는 '공무도하가'의 여옥의 입장에서 노래 대신 기사문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건의 주요 무대가 되는 곳은 가상의 해안 도시 '해망'이다.

 

<공무도하> 속 '해망'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지난 몇 년간 신문의 사회면에서 봤던 굵직 굵직한 사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여전히 논쟁이 뜨거운 4대강 사업을 비롯해 새만금 간척사업, 매향리 미군폭격훈련장, 미군 장갑차 사건, 성남 등굣길 덤프트럭 참변, 농어촌 국제결혼 문제 등 실제 일어났던 사건의 일지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만큼 <공무도하>의 이야기는 소설이지만, 엄연한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 현실을 작가는 기사를 써 내려가듯이 공정하고 정확하게 묘사할 뿐, 작품 속 노목희처럼 어떤 긍정이나 부정의 의견도 개입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현상을 현상으로 전달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독자들이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두고, <공무도하>라는 배를 타고 저 쪽으로 건너가는 독자를 그저 바라볼 뿐이다. 작가의 이런 서술 방식때문에 이 작품의 주제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다. 노를 젓지 않는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처럼 <공무도하>란 배에 올라탄 이상 독자들도 스스로 노를 저으며 이 책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글을 쓰는 작가의 고통에 비하는 이 정도의 수고는 독자로서 행복하게 감내해야할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 몸소 책의 의미를 찾고 나만의 느낌과 생각으로 정리한 새로운 <공무도하>를 만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던 것 같다.  

 

장철수의 말처럼 '던적스러운' 인생살이에서 '제3자란 없다. 당사자가 있을 뿐이다. 모든 인간은 모든 인간의 당사자이다.'(p.38).

누구보다 나을 것도 없고 누구보다 못할 것도 없이 모든 인생은 당사자가 제 각각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큰 그림에서 강을 건너고 말고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이 곳에서 저 곳으로 떠나는 것이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 위한 것이 되기도 하고, 설혹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건너간 그 곳이 먼 훗날 돌아올 곳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공무도하> 속에서 만난 이들이 가르쳐 주었다. 책 속에서 사건 사고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문정수'가 '백수광부'라면 '노목희'는 그에게 '여옥'인 셈이다. 반대로 유학을 떠나는 '노목희'가 '백수광부'라면 한국에 머무는 '문정수'가 '여옥'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백수광부'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여옥'이다. 그리고 강의 이 쪽과 저 쪽 어딘가에서 강 저 편을 바라보며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가는 인생들이다. 소설 <공무도하>는 그 평범한 인생들에게 바치는 김 훈 작가의 현대판 '공무도하가'이자, 자꾸 어디론가 떠나려고만 하지 말고 지금 서 있는 이 곳에서 함께 살자는 담담한 초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