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은 표현을 하고 싶을 때에는 곧잘 음식에 비교를 자주 하는 편이다.

음식에 비교하고 싶은 책 한 권이 있다.

맛 나는 음식은 한번 후딱 먹어 치우기엔 아깝듯이, 읽을수록 맛깔스러운 책은

밤을 꼬박 새워 단숨에 읽고 책장을 덮어버리기엔 뭔가 아쉽다.

이 책이 그렇다. 두고두고 아껴보고 싶었던 책이다.

 

학자의 고향

선 듯 책 제목만 봐서는 옛 조선 시대 유명한 학자의 고향 이야기인가? 하는

섣부른 의문점이 먼저 머리에서 맴돌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오고 간다.

그 학자의 고향을 찾는 건 책을 읽는 사람의 몫이다.

 

이 책은 kbs"학자의 고향" 제작팀에서 만든 것이다.

방송에서 방영된 내용 중 일부를 추려서 책으로 만들었다.

여기에서는 16인의 조선시대 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름만 들어봐도 어떤 인물인지 알고, 일부 학자들은 나의 관심 목록에

있는 학자들도 있다.

 

나는 방송을 보질 못 해서 거기에 나온 모든 인물들의 특징이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는 삶의 질곡이

참으로 닮았다는 생각을 해봤다.

조선시대는 붕당정치의 시대였다. 한솥밥을 먹던 정치적 동지가 내일은 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고, 정치적 소용돌이에 엮이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대상황이 살얼음판이었다.

말 한마디, 상소 하나에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과 가문의 생존이 달려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주 옛사람들의 이야기와 삶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메시지와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었다고 말하고 싶다.

힘든 여건과 주변 상황에서도 본인이 하고자 하는 열정을 뿜어낸다는 것은 보통 굳은 결심이

아니고선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후세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때로는 변절자로, 반역자로 인식될 수도 있었지만, 당시 그들에겐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책 내용에 나오는 인물들의 활동 무대는 한 곳에 국한(局限)되어 있지 않는다.

벼슬을 하면 궁궐이 있는 한양에서 생활하고, 정치적 문제에 관여되어 죄를 짓거나 역모에 휘말리면

유배지를 떠돌기도 한다. 그리고 해배(解配)가 된 후에는 고향에서 말년을 보내거나

다시 정계에 복귀를 하기도 한다.

또는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기도 하지만 여기에 나온 인물들은 대부분 말년을 쓸쓸하게 보내다가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은 학자들도 있지만, 일부는 유배지에서 많은 업적을 쌓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 예로 추사 김정희나 다산 정약용 같은 경우다.

첫 장에 제일 먼저 나오는 인물은 조선 건국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삼봉 정도전 이야기다.

그의 운명은 참으로 용두사미(龍頭蛇尾)랄까? 끝은 비참했다.

죽음으로서 끝을 맺고 다시 모든 게 원위치로 돌아왔다면 다행이지만 몇백 년이 지나도록

그는 명예가 복원되지 못 했다.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던 조선이라는 유교 국가가 서산에 해 넘어가듯 끝이 보일

시점에서야 그의 명예는 겨우 복원이 되었다.

조선을 세우고 죽었다가 조선의 끝자락에 저승에서 겨우 명예는 찾았다고 해야 하나?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것이 평소에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곤 하지만

정치적 갈등이 아니었다면, 이들의 업적을 국가정책으로 삼아 정치를 하였다면

조선은 조금 더 생명 연장의 가능성이 있었을까?

외세의 침략을 덜 받지는 않았을까?

지금 대한민국이 더 잘 살지는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하지만 모든 것이 조선, 그리고 이 나라의 운명이었던 걸까?

지금의 정치상황도 야당이니 여당이니 온갖 색깔론에 모략질하며 개인이 소속된

정당의 이익과 정치인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만 통치를 하고 정치를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오히려 민본정치를 외쳤던 정도전이 그립기도 하다.

또한, 다산 정약용처럼 목민심서를 직접 쓰면서 얼마나 백성들의 삶을 걱정했을까? 

개인의 이익과 당쟁을 위한 것이라면 그런 책을 써 나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억되는 학자는 추사 김정희다.

개인적으로도 추사에 대한 관심은 참으로 많다.

그의 서체에 대해 공부도 하고 싶을뿐더러 그의 삶도 다시금 차근차근 살펴보고 싶다.

그가 쓴 글씨는 현판위에 흔적을 뿌려놓아 지금도 많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이 불교 유물이다.

즉 사찰의 전각에 사용되었다는것. 유학자로서 당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공간이 사찰이었음에도

그의 흔적을 절간에서 많이 보인다는 것은 그의 철학이나 인품을 알 수 있는 유형의 물증이 된다.

초의 선사와의 교류도 빼놓을 수가 없다.

추사 김정희와 연계된 인물로는 초의 선사, 소치 허련이 있다.

추사와 초의는 비슷한 나이고, 소치의 스승은 추사다

 

오래전에 전남 목포를 여행 중에 우연히 남농 허건 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남농 허건은 소치 허련의 손자다. 가문의 후손 대부분이 소치의 DNA를 이어받았는지 몰라도

그림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부터 소치 허련에 많은 관심이 생겼다.

그 후 대흥사 일지암에도 올라 추사와 소치, 초의 세 사람이 담소를 나누며

다우 지정(茶友之情)을 나누는 모습을 상상도 해본 추억이 새롭게 돋아난다.

 

추사 또한 유배의 화살을 피하진 못 했다.

고단한 삶이 연속 되는 유배지에서 추사는 깨달음을 하나 얻은듯하다.

그동안 자만하던 자기의 능력을 감추고 조금 더 겸손해지는 마음가짐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유명한 원교 이광사와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오늘 나는 추사 김정희에게서 "입고 출신(入古出新)과 불계 공졸(不計工拙)"의 뜻을 깊이 새겨 

앞으로 살아가는데 정신적 지침으로 삼고 싶다.

 

책 속의 16인 학자들은 누구 하나 자기의 삶과 철학은 대나무처럼 꼿꼿한 마음가짐으로

다반향초(茶半香初)와 같아서 죽을 때까지 흐트러짐이 없는 유학자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프랑스 혁명사"라는 불후의 명작을 쓴 '토마스 카알라일'의 말이 생각난다.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