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같은 더운 여름,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류현진 선수의 선발 등판 게임을 틀어준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15~13년 전 필자가 그랬다.
더운 여름, 짜증나고 졸리는 오후
찜통같은 교실에서 전혀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선생님이 교실에 있는 TV를 켜주셨는데 마침 박찬호 경기가 나오면
자던 친구들도 벌떡 일어나 무섭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는
우리의 영웅이었다.
하필 박찬호 선수가 LA 다저스의 실질적인 에이스로서 맹활약을 했던 시기에
그와 나, 그리고 우리의 조국인 대한민국은
IMF 사태라는 사상 초유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대마불사를 외치던 대기업들은 줄줄이 도산했고
일본식 평생직장의 약속은 휴지조각이 되어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이 도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힘없는 정부는 IMF의 모든 요구에 굴복하였고
국민들은 아이들 돌반지와 금목걸이를 꺼내어 금모으기 운동에 나섰다.
아시아의 4대 용, 선진국 진입, 국민소득 2만불을 외치던
대한민국의 자존심은 그렇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때 우리 국민들의 자존심을 지켜준 이는
김대중 대통령도 이건희 회장도 아닌,
바로 박찬호 선수였다고 감히 장담한다.
전인미답의 메이저리그에서 시속 150을 가뿐히 넘기는 강속구로
엄청난 파워와 컨택 능력을 자랑하는
세계 유수의 타자들에게 삼진을 빼앗고 결국 승리를 거두는 모습에서
우리 국민들은 위로를 받고 자존심의 일시적인 회복을 만끽했으리라.
2000년 18승, 방어율 3.27
2001년 올스타 출전 등 그
의 성취는 우리 국민들에게 동질감을 넘어선 감동을 주었으며
우리는 그의 투구 하나에 울고 웃었다.
다시 한번 장담컨데, 2002년 월드컵 4강을 제외하고는 우리 국민을 그렇게 들었다놨다 한 것은 박찬호의 투구뿐일 것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통틀어 볼 때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신들의 영웅을 잘 대하는데 매우 서투른 민족인 것 같다.
LA 다저스 시절에도 박찬호 선수가 조금이라도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
언론은 광분하고 팬들은 분노하며 그를 응원하기보다는 질타하기 일쑤였다.
요즘 일베충들이 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아무 이유없이 욕설을 하듯
어린아이들도 박찬호 선수의 욕을 (물론 잘할 때는 환호하지만)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지금의 필자의 나이보다도 어린 그가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외롭게 뛰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를 보듬아주지 못하였다.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고, 필자 역시 깊이 반성하고 있다.
그런 박찬호 선수가 선수생활을 정리하며 낸 책이기 때문에,
사실 필자는 약간의 의무감으로 이 책을 구입했다.
한국 야구 아니, 한국의 영웅인 그가 자신의 커리어를 정리하는 자서전을 냈다면
마땅히 구입하는 것이 나의 도리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종의 빚을 갚는 의미도 있었고..
물론 그는 나의 책 구입 따위는 신경쓰지 않을 정도의 거부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책 속에는 그동안 많은이들이 몰랐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에서 구입한 것도 사실이다.
허나 내 예상은 완벽히 빗나갔다.
아, 미리 알아야했다. 그가 요즈음 SBS에서 방영하는 '땡큐'라는 프로그램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혜민스님, 차인표라는 힐링의 대가들과 대등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그를 한낱 '(무식한)야구선수' 로 취급하고
그의 책을 야구선수가 몇몇 에피소드나 더해서 자신의 야구 커리어를 시간순서대로 쭉 정리한 글이겠지...라는 결론을 내린 나의 예상은...여지없이 무너졌다.
물론 책에는 그의 야구인생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한다.
그가 시골인 공주에서 넉넉치 않은 상황을 견뎌내며 열심히 야구를 한 이야기,
야구명문인 한양대에서 활약하면서 자부심을 갖는 동시에 당대의 천재들이라 불린 연대의 임선동, 고대의 조성민에게 가졌던 열등감. 이를 승화시켜 발전을 이루어낸 그의 노력
그리고 메이저리그 진출
메이저리그 직행, 마이너리그 강등, 풀타임 메이저리거 활약, 완봉승, FA, 부상, 트레이드 등등
그의 메이저리그 커리어 뿐 아니라 일본, 한국에서의 커리어 역시 책에 담겨 있었다.
그러나 박찬호 선수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런 사실들의 나열, 이를 통한 은근한 자기 자랑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그 시점에서의 자신의 감정을 가감없이 이야기한다.
동시에 그의 고뇌, 위기 때 겪은 괴로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자만, 방심 등
솔직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중요한 것은 들려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박찬호 선수가 스스로 경험한 사건들과 느낀 감정들을 통해 얻은
일종의 깨달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또 하나, 이 책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언론을 통해 접한 그의 야구커리어의 단편적 사실들
이상의 것들을 알려준다.
그러한 사건들이 있었을 때 박찬호 선수가 겪은 심적인 고통, 고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이를 통해 우리는 최초의 메이저리거인 박찬호 조차도 이렇게 힘들고 고민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평범한 우리들처럼
그러나 우리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성실함과 의지,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여
결국 모두가 존경하고 인정하는 커리어를 이루어낸 것이다.
마치 독자들이 소설 속의 주인공과 동감하면서 감정정화를 얻는 것처럼
우리는 그를 통해 인생을 배우는 동시에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을 단순한 자서전 혹은 야구책이 아닌
힐링서적의 반열에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야구로 풀어낸 힐링서적' 이라고 해야할까?
그렇다. 쉽지 않은, 남들이 오르지 못한, 대단한
경험을 한 그가 얻은 많은 노하우와 깨달음이 이 책을 통해 비교적 쉽게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를 것 같다. 필자는 야구를 좋아하고, 박찬호 선수의 기록이나 커리어를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어서 그의 이야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독자들에게 전해진다.
책의 자세한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한가지만 예로 들어보자면,
그의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목표를 향한 무서운 질주는
다른 많은 그의 장점 중에서도 필자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던 것 같다.
텍사스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며 먹튀라고 욕하고
뉴욕 메츠, 휴스턴 애스트로스 등으로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어 갔을 때도
'돈도 많이 벌었는데 박수칠 때 은퇴하지'라고 혀를 찼고
결국 2009년 필라델피아에서 구원투수로 멋지게 부활한 그를 보며 찬사를 보냈다.
결국 그는 양키스와 피츠버그를 거쳐 그가 처음 목표로 삼은 메이저리그 동양인 최다승
124승을 거두고 메이저리그에서 은퇴했다.
그 도전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땀과 고뇌와 눈물이 있었겠는가
필자와 같은 냄비들의 반응들을 견뎌내며
묵묵히 노력을 한 그는
결국 그가 세운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는 그의 모습이다.
그러나 책의 전반을 보면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그에게 배울 점은 이외에도 수두룩하다.
2012년 11월 30일 그는 선수 생활을 은퇴했다.
그는 은퇴했지만 그의 기록과 업적은 우리에게 남아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그의 선수생활 이야기가 담겨있기에
이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가치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는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한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저리거이자
성숙한 시민이니까..
이 자리를 빌어 마지막으로 박찬호 선수에게 (그는 관심도 없겠지만)
한말씀드리고 싶다.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끝이있어야시작도있다,
박찬호,
박찬호자서전,
박찬호책,
박찬호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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