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읽은 후 미니 감상평

처음부터 끝까지 이메일로만 이루어진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내 생전 이렇게 독특한 소설은 처음이다. 이메일로만 구성되어 있어 다소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전혀 걱정이 필요 없는 소설이다. 처음 이 소설을 접하게 된 계기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알게 되었다. 라디오를 켜는 순간 레오와 에미의 대화가 흘러 나왔다. 마치 마법에 걸린 듯 그들의 대화를 엿듣다 바로 그 자리에서 책을 주문해 버렸다. 

보이지 않은 얼굴과 1년 남짓 이메일로만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 그게 과연 가능할까? 나에게는 불가능 할 것 같은 일들이 에미와 레오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만남은 ‘에미’의 잘못된 메일로 시작되었다. 구독 잡지를 해지하기 위해 보낸 메일이 그만 ‘레오’라는 남자에게 잘못 수신된 것이다. 미안함으로 시작한 메일은 차츰 장난으로, 그들만의 비밀로, 가상 애인으로, 일상 탈출로, 사랑으로 변하게 된다. 레오는 언어 심리학 교수로 여자친구 마를레네와 이별 후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고, 에미는 남편과 두 아이에게서 탈출하고 싶은 시기에 만나게 된 것이다. 레오에게 에미는 ‘마를레네 극복요법’에 속했고, 에미에게 레오는 ‘가족 타임아웃’ 시간이었다. 메일을 주고받는 시간은 일상 밖에 있는 작은 섬에 단 둘이 머무는 시간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은밀한 시간이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그렇다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랑데뷰는 점점 깊어져 갔다.

글과 사랑에 빠진 남녀. 하지만 현실을 무시한 가상은 영원히 행복할순 없다. 에미에게는 명백히 가정과 남편이 있는 여자다. 메일이 깊어질수록 레오는 에미의 남편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그의 질투와 거친 말투가 좋다. 그녀에게 레오는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자, 바깥세상이니까. 현실은 그러니까 집과 아이들과 남편은 빈틈없이 굳게 닫혀 있는 요새에 불과했다. 스스로 아니 남들에게조차 당당히 ‘행복한 결혼 생활’이라고 자부해 왔지만 그건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사실 그녀는 평화로운 일상이 행복하면서도 불행했다. 그것은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 짝을 이룬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수도 없이 레오를 향한 마음에 브레이크를 걸어봤지만 그건 진실을 숨긴 거짓에 불과했다. 어떻게 레오와 에미는 한 번도 보지 않은 인물과 사랑에 빠지고, 일상의 전부가 되고, 숨김없이 거침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만의 비밀을 털어 놓을 수 있었을까? 정말 그들의 이메일은 꾸밈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특별히 예쁘게 보일 필요도, 착하게 보일 필요도, 예의를 차리며 좋은 말을 골라 써야 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서로에게 그 어떤 모습으로도 아닌 그냥 에미로, 레오로 설 수 있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랑이 된 것이다.

이 책의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레오에게 보낸 그녀의 남편의 메일이다. 그의 간곡한 부탁은 그녀를 제발 만나 달라는 것이다. 이 소동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도록 제발 아내를 만나 환상과 글로 지은 사랑의 유토피아에 형상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줄곧 젊고 예쁜 그녀와 살면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그녀를 상상하고 또 상상했지만 우려했던 사태보다 훨씬 나쁜 상황이 찾아 왔다고 고백했다. 아내가 그를 보듯이 상처받기 쉽고, 불완전하고, 흠 많은 피조물의 하나로 레오를 볼 수 있어야 비로소, 아내의 사랑을 다시 얻기 위해 그와 싸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메일 속 레오는 만질 수도 없고,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도 아닌 한없이 행복한 상상이 만들어낸 그녀만의 ‘외부 세계’였던 것이다. 그는 그걸 막을 힘이 없었던 것이다. 오직 자신의 아내가 레오를 만나 하루 빨리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제발, 자신의 아내와 만나 하룻밤의 밀회를 즐기고 그녀가 다시 땅에 발을 딛을 수 있도록 그녀를 놓아 달라는 남편의 길고 긴 눈물의 메일. 정말, 말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가슴이 아프고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다른 두 남자를 사랑한 그녀, 그녀는 다른 방식, 다른 모습, 다른 형태로 두 남자를 사랑하다 결국 감정의 선이 모니터를 벗어나 결국 한 남자만을 사랑하게 된다. 일상의 지루함이 만들어낸 하나의 탈출구 같은 사랑. 내가 본 그들의 사랑은 그랬다. 때론 누구나 일탈을 꿈꾼다. 이런 식으로 감정교류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랄 뿐이지만 어쩌면 그들이 주고받은 사랑은 일탈이 만들어낸 일종의 모순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