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1931년10월20일- 2011년01월22일)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연히 동생이 발견하게 된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출퇴근길에 잔잔한 동화를 읽기에 딱 좋은 시기라 생각했다. 이제 불과 선생님이 이 세상을 떠나신지 한 달 조금 넘은 시간이 흘렀지만 선생님의 글을 마냥 좋아했을 뿐 얼마 읽어보지 못한 선생님의 작품과 세계에 대해 조금 아쉬움이 남아 있던 터였다. 불혹의 나이로(40세) 문학계에 등단하여 거목이 되셨던 박완서 선생님은 어쩜 그리도 글을 맛깔스럽게 표현하시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가 흔히 안고 있는 문제도 소박하게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철학적인 의미를 담아 세상을 향해 속삭이셨다. 그러한 선생님의 문학적 특징을 잘살려 만든 작품이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이 여덟 편의 짧은 이야기들은 1970년대 말 청소년들과 젊은 엄마들을 주 독자층으로 겨냥하고 쓴 글들 중의 일부라고 한다. 출구라고는 보이지 않는 답답하고 어둡던 유신시절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이상한 열정으로 보문동 오래된 한옥 안방에 밥상을 들여놓고 책 한 권 분량의 원고지를 메꿨다. 연재가 아닌 전작으로 책 한 권을 쓰기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셨다.

 

나는 선생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한 어른을 위한 동화를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의 글이 묵직하고 고전적 향내가 풍겨나는 이유를 이제야 조금은 알것 같다. 비밀..... 즉 삼라만상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색깔을 발견하셨던 것이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못난 비밀이라 할지라도 수박은 수박만의 비밀을, 앵두는 앵두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따끔따끔한 밤송이 속에 숨겨진 오돌오돌하고 고소한 밤의 비밀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밀은 비밀답게 각기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사물 속에 감춰져 있다. 사물의 비밀과 만나는 일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참맛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참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은 결국 수박 겉핥기이다. 수박도 참외도 사과도 겉만 맛보고 그것이 전부인 냥 우리는 야기하고 있다.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쪼개도 보고 부딪혀도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굴비 한 번 쳐다보고>에서도 느낀 사실이지만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에서 강하게 느낀 마음이다.

 

지독한 구두쇠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농사를 지어도 겉보기만 번드르르하고 정작 맛도 없는 개살구요, 둘째는 소리꾼으로 목청만 좋을 뿐 텅빈 소리만 흘러 흥이 나야할 자리에 음산한 소리만 터져 나왔다. 셋째는 손재주가 좋아 화가가 되었는데 실물하고 똑같은 그림을 화폭에 옮겨 담아도 사람들은 실망만 하고 돌아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 사람 모두에게 얼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얼이 빠져 있기에 꽃과 똑같은 그림을 그려도 죽은 그림이요, 번드르르한 과일을 수확해도 물맛 나는 과일이요, 아무리 멋진 창법을 써도 울리는 꽹과리였던 것이다. 생에 맛을 알기 위해서는 단맛, 쓴맛, 매운맛, 짠맛을 다 겪어야 진정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보시니 참 좋았다>에서는 할아버지가 아주 가난한 소년일 적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신부님은 학용품과 함께 화구까지 사주셨다. 그러고는 엄청나게 큰 화판을 내주시면서 뭐든지 그려보라고 하셨는데 그곳이 훗날 관광지로 선정된 성당벽화이다. 아무도 그림의 주인공이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마 나 였으면 잘난체를 하느라 벌써 방송한 프로그램에 전화하고 그 성당에도 알렸을 것이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자신도 마치 TV를 보고 관광하러 온 사람처럼 그림만 보시고 떠나셨다. 손주에게 설명한 할아버지 말이 정말 명품이다. “내 평범한 그림을 예술로 만든 건 오랜 세월과 사람들의 변함없는 사랑이었다. 명품으로 치는 골동품도 태어날 때부터 명품이었던 게 아니라, 세월의 풍상과 사람들의 애정이 꾸준히 더께가 되어 앉아야 비로소 명품이 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