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왔다.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몰아치는 여름. 실망스럽긴 했으나 <배틀쉽>을 개봉 주에 봤고, 벌써 <어벤져스>를 두 번 보고 왔으며, <다크나이트 라이즈> 때문에 5월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 <프로메테우스> 때문에 6월을 기다린다. 재난영화라 하면 자연재해만 떠올리기 쉽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들도 막대한 인명 및 재산 손실을 일으키는 재난영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재난영화가 성공하는 것은 대부분 외산이고, 해마다 개봉하는 국내 재난영화는 씁쓸한 맛을 보기 십상이다. 비단 영화에서만 이런 결과를 보게 되는 건 아니다. 영화의 원작인 경우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해외에는 재난을 소재로 한 소설이 꽤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우리나라는 이러한 소설이 없었다.

 

 

비슷한 배경을 소재로 한 소설은 있었다. 물론 더 많겠지만, 내가 읽은 것으로는 배명환의 연작소설 <타워>가 있다. 600층이 넘는 초고층 빌딩이 하나의 국가로 행사하게 되면서 외부 세계와 갈등을 겪고 핵미사일에 대응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부와 권력에 따라 계층이 나뉘는 현실과 탐욕을 상징하는 바벨탑으로 거론된다는 점이 이 책과 비슷하다. 이재익의 소설 <싱크홀>은 강남의 초고층 빌딩이 수직낙하한다는 가상의 재난상황을 통해 각종 어두운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그에 따른 인간성의 균열을 지적한다. 배명환의 소설보다 유쾌하진 않지만 나름의 진지함이 있다. 배명환의 소설이 재미진 웹툰 같다면 이재익의 소설은 그야말로 영화 같다.

 

 

다수의 영화 시나리오를 썼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프로그램의 PD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글의 흥미도는 검증된 편이다. 다만 그의 소설은 문장력에서 볼 때 노벨상 감은 아니다. 세련되고 절제된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연재소설 같은 흥미로운 문장을 쓴다. 사건 발생 전후 1주일을 시간 순으로 구성한 내용은 현장감을 더한다. 그의 책이 영화화 된다면 칸 영화에 출품돼 작품상을 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제대로 된 연출과 함께라면 거뜬히 국내 흥행 1위는 노릴 수 있을 것이다. 장르의 특성을 잘 살려내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익숙함을 주기 쉽고, 대중적인 감성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공감을 얻기에도 쉽기 때문이다. 고상한 문학을 찾는 사람에게는 만족감을 주기 어렵겠지만 지루함을 달랠 거리를 찾는 사람에게는 탁월한 선택이 될 소설이다.

 

 

언제 어떻게 닥칠지 모르는 재난. 점점 자주 들려오는 세계의 자연재해 소식은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기술과 그것으로 채우려 하는 욕심 때문에 인공재해로 보이기도 한다. 재난 소식을 들으면 어쩐지 죄책감이 드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 같다. 이재익의 이 소설 또한 비슷한 느낌을 준다. 가장 높은 곳을 향하던 탐욕의 상징이 가장 낮은 곳을 향하고, 깨졌던 관계가 이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와 치유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실이 될지도 모르는 소설 속의 이야기에 불안감 섞인 반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교훈을 주고 싶어하는, 혹은 이재익의 시나리오에 흥미를 느낀 영화 제작자가 이 소설을 영화화 할 날이 곧 올 것 같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김지훈 감독의 <타워> 때문에 안 되려나. 음, 글쎄.

 

 

시저스 타워는 123층짜리 초고층 빌딩이었다. 이전까지 타워팰리스 3차 건물이 갖고 있던 최고 높이 기록을 간단하게 갈아치워버리는 층수와 높이엿다. 시저스 타워는 모든 면에서 국내 최고였다. 일단 초현대식 감각으로 마무리한 디자인부터가 기존의 빌딩들과는 달랐다. 빌딩 안의 설비는 물론이고 타워 안에 입점한 기업과 명품숍, 쇼핑몰의 규모, 심지어 주차장 크기까지 단일 건물로는 대한민국 1위였다. (35쪽)

 

 

이유를 모르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20년 동안 헤아리지 못할 만큼 많은 위험을 직면하고 넘어서면서 생긴 후천적 본능이었다. 태풍을 감지하는 새의 감각처럼 혁의 몸 어딘가 존재하는 안테나가 삑삑 경고음을 울렸다. (70쪽)

 

 

겸손하라고. 너희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지구 위에서 잠시 살다가 사라지는 수많은 종족 중 하나일 뿐이라고. (173쪽)

 

 

당시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전문가들의 예상이 잇따랐다. 주변 지반의 추가 붕괴와 싱크홀 자연 매립 가능성에 대한 경고도 잇따랐다. 구멍 워낙 깊어 헬기에서 찍은 사진으로는 검고 거대한 구멍만 보였지만 특수 적외선 촬영으로 얻은 사진에 따르면 이미 옥상 부근은 구멍 단면에서 쏟아져 내린 흙으로 덮여 있었다. (223쪽)

 

 

언론에서는 여전히 싱크홀 뉴스 특보를 쏟아내고 있었지만 도시의 일상은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서울 전체가 꺼져버리기라도 할 듯 공포에 떨던 시민은 다시 아이 교육 문제와 전세금 대출과 아이돌 가수의 컴백 소식과 증시 동향으로 관심을 돌렸다. 싱크홀 주변 반경 10킬로미터 내 대피 명령이 내려졌던 반포 지역에도 대피 경보가 해제되면서 주민이 돌아왔다. 그들은 며칠 비워두었던 집을 청소하고 편안하게 잠을 잤다. (236쪽)

 

 

"…지금의 구조 작전을 보면 제일 위층부터 차례로 수색 작업을 한다는 얘긴데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건물의 고층부에 있는 부유한 자들이 구조될 확률이 높다는 겁니다. 구조의 손길조차 부의 피라미드와 같은 순서를 따르는 거지요." (238쪽)

싱크홀, 이재익, 황소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