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로 서울을 찾을 용기가 생겼던 중학교 졸업 무렵부터 혼자 미술관에 가곤 했다. 더 다양한 미술품을 접할 수 있는 갤러리는 오늘 날에도 쉽게 들어가지 못하곤 하지만 당시에는 더욱 한정된 곳을 갔었다. 서울시립미술관과 예술의전당, 리움. 미술작품을 온라인 자료와 책자로 보는 건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까마득하지만, 직접 육안으로 확인하며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느끼기 시작한건 그 즈음부터였다. 런던과 파리를 가고 싶었던 이유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였고, 계획대로 두 도시에서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휩쓰느라 하루하루가 꿈 같았다.

 

 

그런데 런던 시내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거쳐 파리의 루브르에 입성했을 때 불현듯 만성이 돼가는 느낌을 받았다. 국내에서 미술 전시를 볼 때에는 아시아 신인작가의 작품을 봐도, 몰랐던 작가의 유고작을 봐도 마음을 흔드는 새로운 작품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설레곤 했다. 그 설렘만으로도 미술 작품을 보는 즐거움은 충분했고, 찾아다니던 작품을 만날 때면 내 앞뒤로 지나가는 사람의 기척을 느낄 새도 없이 완전히 감동받고자 한참을 서 있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명작의 쓰나미를 만나자 뭘 보고 있는건지 까마득해지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루브르에 왔으니 죄다 보고 가야겠다는 욕심이 들었다. 체력이 바닥나자 작품을 작품 그대로 느끼지 못하고 명성을 따라 찾아다니기에 바빴다. 그저 명작을 확인하는 것에 그치기 시작했다. 보고 싶던 작품을 본다는 건 영광스럽고 황홀하지만 이게 진짜가 아니라면? 또 보고 싶었던 작품들을 한꺼번에 보게 되니 아름다움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회의감에 가뜩이나 바닥난 체력이 땅으로 꺼져버리는 듯했다.

 

 

그날 오후 오랑주리에서 모네의 그림을 보며 미술품 자체에서 받는 감동을 다시 느끼게 되긴했지만 미술품을 감상하며 드는 회의는 그 뒤로도 종종 고개를 들곤 했다.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꽤 많은 작품들이 미술계에 대한 회의적 태도로, 나아가서는 '세태 고발'의 수준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 또한 미술계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미술 시장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자생력을 제공하기도 한다. 실제로 희대의 미술 사기극이라는 존 드류의 미술품 위조 사건을 재구성한 것으로, 사기극 덕에 미술계가 더욱 긴장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논픽션이라고 하면 사건 기록일지에 불과한 딱딱한 글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책은 어지간한 픽션보다 더 긴장감 있고 흥미진진하다. 실제 사건이라는 점이 여느 픽션보다 스릴을 주기에 충분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독한 거짓말쟁이로 자신의 인생부터 미술시장의 역사까지 뒤바꿔놓은 존 드류와 생활고와 그의 꼬임 때문에 미술품 위조에 가담한 재능 있는 화가 존 마이어트. 이 두 사람의 심리 및 행동 변화는 어떤 자기계발서보다도 인상적인 삶의 조언을 해준다. 소름 돋는 드류의 거짓말도 이목을 끄는 요소이긴 하지만, 미술계에 회의를 가졌다가 다시 미술계에서 성공하게 되는 마이어트의 인생이 여러 모로 더 매력적이다. 마이어트가 느꼈던 혼란스러움은 내가 느꼈던 회의감과 비슷한 것이었고, 그가 느낀 것은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재기는 내가 앞으로도 마음을 놓는 것은 물론 훨씬 즐겁게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희망이 되어준다. 이 책은 예술의 본거지라 불리는 유럽에서 벌어진 놀라운 사기극이 주는 스릴과 재미에,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감상 포인트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 대중에게 미술관은 벽에 걸린 미술품과 다를 바 없다. 이들 기관들이 미술품의 창작 순간부터 판매 과정 그리고 가장 최근의 소유자에 이르기까지, 주요 작품들 각각의 소유주가 어떻게 바뀌어왔는지에 관한 기록을 샅샅이 모아야 하는 기념비적인 과업을 수행한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도록은 해당 작품의 양도 역사를 기록하는 데 도움이 되고, 판매 영수증은 언제 어디서 주인이 바뀌었는지를 보여준다. 일기와 서신 그리고 초기 드로잉들 또한 작품 자체를 조명한다. 소유권에 대한 문서 기록은 오늘날 작품의 질 또는 예술적 스타일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 못지않게 예술 작품의 진위 여부 확인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술계에서는 이런 과정을 두고 '소장 내력 입증하기(establishing provenance)'라고 표현한다. (16~17쪽)

 

 

마이어트는 그가 알고 있기에 자코메티, 비시에르, 샤갈, 르 코르뷔지에의 지독히 형편없는 작품을 여러 점 그렸고, 드류는 그것을 아주 헐값에 팔아치웠다. 이런 과정 속에서 마이어트는 예술계에 대한 존경과 신뢰감이 모두 증발해버렸다. 명성이 자자한 중개업자들조차 할인 혜택이나 의심스러운 진품 인증서에 휘둘렸다. 그는 평생 갤러리나 도록, 미술관 등지에서 본 그림들 중에 위작이 몇 점이나 될까 궁금해졌다. 더 이상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105쪽)

 

 

힉스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공적인 판단을 그르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드류가 취조 중에 이상하리만치 침착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오랫동안 형사 일을 해온 힉스는 아무리 선량한 시민이라도 경찰서에 불려오면 긴장하는 경향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드류는 지나칠 정도로 편안해 보였다. (215쪽)

 

 

문화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위작에는 원작에 깃들어 있는 특별한 아우라가 없다면서, 특정 공간 및 시간과의 개인적인 접촉이 만들어내는 작품의 정수는 복제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선이 악을 이긴다고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위작들도 결국에는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라고 믿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상당히 회의적이다. 그리고 역사는 두 번째 무리를 지지한다. (318쪽)

 

 

셜리는 키팅이나 마이어트와 같은 위조범들이 미술계의 건강한 요소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중개업자들과 미술사학자들이 미술품으로서 승인하고 판매하기로 결정한 작품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327쪽)

 

 

하루는 캔버스에 코끝이 닿을락말락할 만큼 그림을 가까이 들여다보다가 표면에 붙어 있는ㅡ모네의 붓에서 빠진ㅡ털 몇 자락을 발견했다. 마이어트는 항상 자신의 작품에 붓털이 묻지 않게 했으나, 이 모네의 붓털이 그에게 뭔가를 일러주는 것 같았다. 그것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세상에 오나벽한 그림이란 없다.' (411쪽)

미술품위조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