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지성이라는 말은 진부할 정도로 식상한 표현이지만 정작 붙일 이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 드문 수식어이기도 하다. 도정일 선생은 이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 중 하나다. 최재천 선생과 썼던 <대담>을 통해 주목한 것이 벌써 10년 전. 도서관에서 최재천 선생의 생각과 글이 좋아 자연과학과 인문학 서가를 오가던 때였다. 최재천 선생과 쌍수를 들어 하이파이브를 하듯 열띠고도 쿵짝이 맞는 담론을 펼치던 도정일 선생을 맞닥들였을 때 인문학적 공감과 존경의 마음을 지녔었다. 이미 팬이 되어 있던 최재천 선생의 후광이 없지는 않았지만, 평소 동류로 생각한 것은 이과보다 문과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도정일 선생의 시각에서 문제를 대했고, 그래서 더 빠르게 도정일 선생의 생각과 글에 반했던 것 같다. 

 

 

도정일 선생이 존경 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인문학적 공공복지에 힘 써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전국민 책 읽기 열풍을 일으켰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프로그램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기적의 도서관' 설립을 주도한 것 뿐 아니라, '책 읽는 사회문화재단'의 상임대표로 국민의 독서 활동을 위해 애쓰고 있다. 물러났던 대학에서의 교수직을 '후마니타스 칼리지'라는 경희대의 인문학 교육대학의 학장을 맡으며 되잡았을만큼 칠순이 넘는 나이에도 젊은이들의 교육, 사회의 교육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일은 다른 학문보다 더 많은 생각의 나눔이 필요하다. 인문학 수업은 교수의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교육자와 청강생이 서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고 더 많은 시간동안 스스로 고민을 해야하는 것이다. 물질에 치우친 사람들의 가치관을 보다 인본주의적인 위치로 옮겨오는 일, 적어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이해하고 주어진 선택권을 바르게 행사할 수 있는 가이드가 되는 일이 바로 인문학 교육의 내용일 것이고, 도정일 선생은 이러한 일을 사회적 영향을 주는 활동들과 학교 안팎에서 진행하는 강의를 통해 전해왔다.

 

 

도정일 선생의 산문집이 시리즈로 출간된 데는 이와 같은 인문학 교육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출판사가 기획하고 제작하여 홍보하는 책은 영리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고, 여느 책이나 그런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치 있는 책과 아닌 책의 차이는 개인과 사회에 의미를 줄 수 있는가 하는 데서 올 텐데, 도정일 선생의 산문집의 경우 인문학적 교육이라는 역할을 통해 충분한 의미를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꽤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에게는 아무 감흥이 없을 수도 있고, 인문학자의 산문집이 잘 팔리는 경우는 흔치 않은 데다 도정일 선생의 글은 대중에게 잘 팔리는 젊은 학자들의 글처럼 트렌디한 것이 아니니 출판사의 어떤 이에게는 판매 수익에 대한 염려를 놓치 못하는 애물단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글, 90년대부터 최근까지 도정일 선생이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삶을 두고, 온갖 쓰잘데 없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것들이라며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은, 분명 어딘가에서 그가 향한 채 걸어온 인문학 교육의 길을 한폭 더 넓히는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이제 '어제'가 되었지만 '내일'이 있었으면 하는 오늘의 큰 사건은 스무 살도 되어보지 못한 어린 학생들에게 큰 위협이며,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신사회인지 보여주는 단면이다. 주변 어선의 주인들이 도와 초기 구조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눈물나게 감동적이지만, 이런 감동을 싸그리 묻어버릴 만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놓아버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악성 메시지를 곳곳에 흩뿌리는 미치광이는 기본이고, 가장 올바른 가치관을 지니고 국민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도와야 할 언론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언행으로 사건을 뒤덮었다. 친구들이 죽음을 오가는 상황에 이런 사회의 반응을 마주한 10대들은 어떤 20대가 될 수 있을까. 도정일 선생 같은 지식인은 점점 더 필요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소리쳐 알리고 있지만, 그만큼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는 데 혼란을 주는 이들 또한 상당하다. 텔레비전과 SNS를 자꾸 들여다보게 되고 보면서 울컥하는 심정을 다스리는 일조차도 견디기가 쉽지 않아 마저 읽은 도정일 선생의 책인데, 어쩐지 착잡함은 더 짙어지는 것 같다.

시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시는 이야기를 갖고 있고 이야기로의 번역이 가능하며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한다. (19쪽)

 

 

여행자는 흔히 두 가지 만남을 경험한다. 그는 여행길에서 많은 것을 보되 그가 본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새로운 것, 아름다운 것, 탐나는 것들이 제아무리 많아도 그는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소유의 왕국에서 해방된 사람처럼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소유할 수 없다. 여행이란 그러므로 소유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 낯선 자유와의 만남이다. 그리고 그는 남의 나라, 그 타자의 고장에 와서 어럽쇼, 어찌된 건가, 거기서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만나듯 제 나라 자기 고장,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115~116쪽)

 

 

사람의 영혼은 언제 병드는가? 영혼을 병들게 하는 요인은 수백 가지이고 그 요인들의 성질을 따져 위계를 정하는 방법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다른 것은 일단 제쳐놓고 우선 운의 문제에 관한 인문학적 사유의 한 자락을 딛고 말한다면,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요인들 중에 첫번으로 꼽아야 할 것은 그 영혼이 운이라 불리는 우연성의 덫에 깊숙이 빠져 그로부터 벗어날 힘을 완전히 상실했을 때다. (199쪽)

 

 

월드컵을 즐기고 우리 대표팀의 분전에 갈채를 보내는 일과 월드컵에 모든 정서 에너지를 '올인'으로 쏟아부어 오로지 '대에한민국'을 외쳐야 애국이 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다. (3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