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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든 읽지 않았든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은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다. 거대한 흰 고래와 싸우는 노인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 같고, 덕분에 <모비 딕>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긴 듯하다. 나는 그런 류에 속한다. 원작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으나 마치 오래 전에 완독한 것처럼 생생하게 장면이 떠오른다. 아마 다양한 종류의 작품에서 재생산 되어 온 것도 한 몫 했을 텐데, 그래서인지 정작 읽지도 않았는데 특별하지 않은 모비 딕 이야기는 식상하게 느껴지는 애매한 입장에 처했다. 재생산 된 창작물들은 잘 만들어진 경우 원작에 한 발 다가가게 하지만, 반향을 일으킬 만하지 않은 경우 오히려 원작에 대해 이 정도 알았으면 됐다는 얕은 만족과 함께 더 이상의 궁금증을 유발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껏 보았던 것들은 대부분 후자로 여겨지는 반면, 맷 키시의 이 강렬한 그래픽 아트는 확실히 전자에 속한다. 작품 전체는 좋았어도 <모비 딕>과 관련된 부분에서 심심한 감상 이상의 것을 주지 못했던 작품들에 비해, <모비 딕>의 페이지 각각을 거침없는 그림으로 표현한 맷 키시의 <그래픽 모비 딕>은 상상력을 무척이나 자극해, 원작을 너무 늦지 않게 만나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하는 힘이 실려 있다. 원작과 <그래픽 모비 딕>은 각 페이지를 일대일로 대응시켜 완성되었다. 원작의 한 페이지에서 맷 키시가 고른 한 두 문장을 인용하고, 맷 키시의 방식으로 그 문장들을 그림으로 탄생시켰다. 맷 키시가 글을 통해 받은 영감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보며, 맷 키시의 그림에서 추가적인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영감의 자원이 풍부한 책이다.

굉장히 진하고 두툼하며 괴기스러운, 말 그대로 강렬한 그림들이다. 다시 말해, 내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하지만 진취적이고 거칠며 험난한 <모비 딕>의 이야기에 딱 어우러지는 그림들이다. 맷 키시는 왠지 모르게 평생을 <모비 딕>을 잊지 못하며 빠져 지내곤 했다는데, 그가 스스로 밝히는 자신의 취향이 괴수가 나오는 만화와 영화들이었다는 점을 볼 때, 그는 <모비 딕>을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겼을 테고, '이렇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겼을 것이다. 취향에 맞지 않는 것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은 대단함을 느낄 뿐 아니라, 마음이 움직이기까지 하는 일은 쉽지 않을 텐데, 맷 키시의 <모비 딕> 장면들을 보며 가히 감동을 했다.

가장 신기한 일은 이것이다. 무시무시하고 숭고하게 그려지는 하얀 괴수는 지금껏 이해되지 않는 캐릭터일 것이라고 생각한 에이해브 선장의 마음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의 집착이 어떤 다른 버전들에서보다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는 맷 키시의 고래 그림들이 지닌 매력이 큰 역할을 했을 텐데, 아닌 게 아니라 그의 고래 그림들은 아주 위압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절묘하다. 여러 고래들을 종류별로 소개하는 대목에서 등장하는 그림들은 벽에 붙여놓고 싶을 만큼 깊은 인상을 남겼다. 글과 그림이 만날 때 보여줄 수 있는 조합이 늘 이렇게 밀착될 수 있다면, 이렇게 판에 박히지 않은 상상이 가능하다는 것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게 한다면, 다시는 그림 없는 글은 읽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내가 아티스트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만화를 그렸지만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걸 한 번도 단점으로 여기지 않았고, 이번 프로젝트의 경우 오히려 그래서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걸로 생계의 수단으로 삼은 적이 없는 탓에 나는 뭐든지 원하는 대로 시도할 수 있었다. 그 작업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8쪽)

나는 내가 해낸 것이 자랑스럽다. 그림들을 다시 보면 흠결이 눈에 들어온다. 바꾸고 싶은 부분들도 보이고, 허둥지둥 넘어간 것 같은 부분들도 보이지만, 마침내 나는 그것들이 온전하다고 믿게 됐다. 이것이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모비 딕이다. 그리고 이 책은 내가 늘 머릿속에 그려왔던 바로 그 책이다. (12쪽)

단독으로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72쪽)

그러므로 다른 상황에서는 흰색으로 고귀하거나 우아한 것을 상징하지만 가장 심오한 관념적 의미에서는 흰색이 특유의 환영을 영혼에 불러낸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207쪽)

어떤 분야에서는 신중한 무질서가 진정한 비결이 되기도 한다. (380쪽)

모든 인간의 생각과 사상은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인가? (4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