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생각. 몇 해 전 떠난 박완서 선생의 글들을 읽는 동안 가장 많이 한 것은 엄마 생각이었다. 그 분의 마지막 원고들을 모아 책으로 낸 장본인이 선생의 딸이기도 하고, 그 분 스스로가 엄마의 입장에서 쓴 글도 적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과 아들을 같은 해에 떠나 보내고 이해인 수녀의 배려로 수도원 언덕 끝 방에 머무는 동안, 수녀님이 엄마 생각으로 우시는 모습을 보았다는 말에, 그 분의 슬픔보다도 수녀님의 엄마 생각에 왜인지 더 마음이 기울어 내 엄마를 생각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그분께서 말하는 '우리 동네'가 진짜 우리 동네인지라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모습이 왜인지 우리 엄마처럼 느껴져서, 더 엄마 생각이 났다. 집에만 오면 볼 수 있는 엄마인데, 괜히 더 멀리 있는 것 같고 마냥 보고 싶고, 그랬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 분을 뵐 기회가 적지 않았는데도 차마 용기를 내지 못 했었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매체를 통해 듣고도, 멀리서나마 한 번 못 뵈었다는 것이 그리 아쉽지 않았었는데, 새삼 그 분의 마지막 원고들을 읽으니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수줍음을 좀 덜었으면, 민폐를 끼치고서라도 내 마음에 담을 모습 하나는 간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렇게 폐를 끼치는 것을 감행했을 것 같진 않지만, 다 지나고서 보니 못내 아깝다. 박경리 선생이 돌아가시고 1년 뒤, 박완서 선생은 나는 개인적으로 박경리 선생님을 알고 있으니 그리운데,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립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고 궁금해하는 이야기를 보며, 비슷하면서도 또한 반대로 나는, 나는 이만큼 박완서 선생이 그리운데, 그 분을 잘 아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그리울까, 하고 궁금해졌다.

 

 

글을 쓰게 되었던 것은 복수심에서였다고 고백하고, 봄까치 꽃으로 알았던 것을 다른 이가 개불알 꽃이라고 부르자 차마 말은 못 하고 속으로 망측해하기도 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손자를 보며 고시를 탈출해 기뻐하기도 하는 한편 마음 다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하는, 솔직하면서도 귀엽고 또 다정한 할머니였던 박완서 선생. 그 분의 글은 매일 읽어도 따뜻하고, 가끔 읽으면 더 따뜻하다. 전쟁을 겪던 시절의 글들이 쓰라리기는 하지만 그걸 겪은 한 여인으로서 단호하게 적어내려간 글들은 뭉클하기 그지없다. 더이상 그 분의 새로운 글을 읽을 수는 없지만, 이제껏 나온 글들을 다시 읽고 또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그리움을 더하고 또 더하며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생애 처음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해보았던 작가이자, 여지껏 이만큼 좋아하는 작가가 없다. 박완서 선생의 글은 언제 읽어도 웃음이 나고, 눈물이 난다. 

나를 달구었던 것은 창작욕이 아니라 증오였다. 복수심과 증오는 세월의 다둑거림으로 위무받을 수 있을 뿐, 섣불리 표현되어선 안 된다는 걸 차차 알게 되었다. 상상력은 사랑이지 증오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의 치 떨리는 경험이 원경으로 물러나면서 증오가 연민으로, 복수심이 참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뀌면서 비로소 소설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아주 잊지 않았기 때문에 쓸 수 있었고, 그 후 오늘날까지 꾸준히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쓰지 않고 보통으로 평범하게 산 동안이 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22쪽)

글을 쓸 때 늙었다고 하는 것은 속도가 느려졌다는 것이 아니라 감수성이 경직되고 진부해졌다는 것입니다. 내 감수성이 진부해지지 않도록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합니다. 어떻게 노력하느냐 하면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것입니다. 또한 문학 외의 예술 분야에도 애정을 갖고 자주 접하고 느낌으로써 내 감수성이 녹슬지 않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좋은 것을 보면 감동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에 감동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그러니까 기성작가도 다 노력을 합니다. (59쪽)

그때는 보이는 모든 것이 왜 그리도 아름다웠던지. 젊은 내 새끼들의 옷깃과 검은 머리칼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조차도 어디 멀고 신비한 곳으로부터 그 애들이 특별히 아름답게 보이라고 특별한 바람처럼 느꼈으니까. 아마도 나는 그때 곧 세상을 하직할 남편의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았을 것이다. (79쪽)

내가 우리 마당에 있는 꽃들의 이름이라도 다 익히려고 하는 것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그리고 거의 매일 아침 그것들이 나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이고, 제때 안 보이면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런 교감 때문에 식구 같다 보니 이름을 모르면 토라질 것 같은 느낌까지 들 때가 있다. (167쪽)

이 나이에 몸이 조금 안 좋은 것이 당연한데, 제 몸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게 됩니다. 오래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몸이 내 말을 잘 안 듣는다는 게 느껴지면서 관찰을 해보니 저하고 제 몸이 같은 것은 아니더라구요.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르지요. 제 정신이 제 몸속에 붙어사는 것 같습니다. 요즘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제가 헌 집에 들어와 사는 것 같습니다. 헌 집은 여기저기 삐거덕삐거덕 하잖아요. 언제 내려앉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생각해보면 한 집이 칠십 년, 팔십 년,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세월을 견디고 나면 여기저기 망가지는 것이 당연하지요.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을 하지만, 죽는 것보다도 내 몸이 어떤 병고를 견디고, 마음은 또 어떤 추태를 부릴까 하는 걱정을 많이 하게 됩니다. (222 ~ 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