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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할 수 없는 세계에서 완전한 고독을 꿈 꾸며, 중년의 여인 아녜스는 사라져버리고 싶어 한다. 반면 그녀의 동생 로라는 다른 이에게 기억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불멸하기를 원한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로라가 아녜스를 따라하는 몸짓, 그리고 두 사람이 남편으로 삼은 남자 폴 뿐인 듯한 이 자매는 자아를 완성하는 방식에서도 정반대를 택한다. 아녜스는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지라도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은 죄다 덜어내고 싶어하고, 로라는 그럴싸한 것들을 덧붙여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심지어 별 생각 없이 키우게 되었던 고양이마저도 마치 자신의 영혼을 대변하는 대단한 상징으로 만들기도 한다.

로라는 괴테를 사랑한 각별한 여인으로 현재와 미래와 미래에 도래할 과거의 역사에 남고 싶어 한 베티나와 닮아 있다. 베티나는 괴테에게 끈질기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해 그의 문학에 특별한 사람으로 기록되길 바라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괴테의 사후에 편집된 서간집이 출간되도록 한다. 베티나의 수작으로 경건하기 짝이 없던 관계가 애틋한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생의 마감을 존재의 마감과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노력은 타인이 보기에 딱할 정도로 필사적이다. 밀란 쿤데라는 괴테와 베티나, 헤밍웨이 등을 새롭게 해석하며 이들을 통해 불멸의 의미를 되짚는다. 이 소설에서 얼마만큼이 진실인지 따지기는 어렵겠지만, 작가의 소설 속에서 불멸을 향한 인간의 욕구만큼은 여느 때보다 뚜렷한 이미지로 와닿는다.

밀란 쿤데라는 실존했던 유명 인물들과 작가가 창조한 몇 몇의 인물들을 배치하고, 그 속의 한 자리에 자신을 심어 둔다. 가뜩이나 비범하게 연결되는 에피소드들 사이에서 작가 자신의 출현은 굉장히 신선하다. 스스로 자신이 창조한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하는가 하면, 또 한 편으로는 그들과 직접 대면하여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워낙 천재적인 작가이니 더 심오한 의도가 있었겠지만, 이미 그가 정립해놓은 강렬한 불멸의 이미지 때문인지 그의 이런 구성 또한 스스로의 불멸을 향한 욕구처럼 느껴진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동안 본 영화와 보고 듣고 겪은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통해서도 반복적으로 불멸의 욕구를 발견하곤 했다. 영화 <르누아르>에서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연극은 아무 것도 아니며 손으로 무언가를 남기는 그림이나 글이야 말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한 부분도 불멸을 뜻하는 것 같았고, 같은 영화 속 데데 또한 쟝 르누아르의 영화를 통해 불멸을 바라는 것 같았다. 심지어 데데는 로라와 닮아 보이기도 했다. 올림픽에서의 선수들의 모습도 결국 불멸이 그들의 목적인 것 같고, 반복적으로 같은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 지인 또한 그 말을 통해 불멸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기에 이르렀다.

불멸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이어지는 다른 등장인물들의 관련 부분에서는 아녜스의 고독에 대한 바람에는 특히 공감했고, 폴과 베르나르의 무신경함이나 아베나리우스 교수의 유희적인 생각, 루벤스의 얼굴과 웃음에 대한 강박까지 각각 부분적으로 공감 되는 부분이 꽤 있었지만, 역시 로라를 통해 보여지는 인간의 불멸을 향한 욕구가 가장 깊은 생각을 낳은 것이다. 이쯤 되면 불멸론자가 되어 불멸의 개념 안에 나 스스로가 갇혀 버리는 느낌일 정도인데, 다행히 소설은 끝이 있어 책장을 덮고 난 이후로는 점차 이런 생각이 덜해지고 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역시 너무도 시적이어서 한 장 한 장을 아껴 읽고 싶고, 이 소설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엔 일독을 끝냈다는 것이 참 다행일 수가 없다. 나는 간사하고 단순한 보통의 인간이기 때문에 이내 불멸에 대한 집착은 곧 잊어버리고 말 테니까, 휴.

만약 조물주의 컴퓨터가 작용하는 영역이 우리 지구뿐이라면, 그리고 우리 운명이 그에게만, 오직 그에게만 달려 있다면, 우리가 사후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우리가 생전에 겪었던 것의 어떤 변형일 뿐이다. 유사한 풍경, 유사한 피조물들만 마주칠 것이다. 홀로 있을까, 아니면 무리 지어 있을까? 아, 아무래도 홀로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삶의 세계에서도 고독은 희귀한데, 사후 세계에서야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이 훨씬 많지 않은가! 사후의 삶은 최상의 경우래야, 아녜스가 지금 휴게실에서 겪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도처에서 여자들의 끊임없는 수다를 듣게 될 것이다. 끝없는 수다로서의 영생. 솔직히 말해 더 나쁜 경우를 상상할 수도 있지만,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여자들의 그런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아녜스로서는 기를 쓰고 삶에 매달리며 죽음을 최대한 지연해야 하는 이유가 되기에 족했다. (26~27쪽)

당신에게 매우 소중한 내밀한 문건들을 불살라 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는 건 이제 당신에게는 남은 시간이 없으며, 내일 곧 죽는다는 것을 자인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파괴 행위를 무한정 연기하게 되며,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너무 늦고 만다.

우리는 불멸을 생각하지만, 죽음과 함께 생각해야 함을 망각하는 것이다. (125쪽)

"우리 자아는 포착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으며, 흐릿한, 단순한 한 외양인 반면, 너무나 포착하기도 쉽고 묘사하기도 쉬운 유일한 실재는 바로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 이미지라는 걸 말이야. 그런데 더욱 끔찍한 사실은 자네가 자네 이미지의 주인이 아니라는 거지. 물론 처음에는 자네 스스로 그 이미지를 그리려고 애쓰지. 그러다가 적어도 그 이미지에 영향력만이라도 행사하고, 어떻게든 통제를 해 보려 들지만 헛수고야. 자네를 보기 딱한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데는 적의에 찬 쪽지 하나면 족하니까." (210쪽)

"이 세상에 나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간직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도대체 난 왜 산 거지? 내 인생에서 남은 게 뭐지? 아무것도 없어, 언니. 아무것도 없다고!" (256쪽)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 수 있는가? 타인들의 기쁨과 괴로움을 자기 것으로 하지 못하면서, 그들과 한통속이 되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들과 함께 살 수 있는가? (409쪽)

"유머는 사람들이 아직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별할 줄 아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네. 오늘날에는 그 경계를 분간할 수가 없어." (529쪽)

스스로 중요하다고 자신하는 어떤 세계의 중요성에 만약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세계에서 우리 웃음의 어떤 메아리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해결책은 하나뿐이다. 아예 그 세계를 통째로 유희 대상으로, 하나의 장난감으로 삼아버리는 것이다. (5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