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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실린 이상의 시 <오감도>를 읽으며 적잖은 충격과 함께, 사춘기 청소년 아니랄까봐 음울하고 초현실적인 분위기에 흠뻑 매료되었었다. 대개 그렇듯 그의 소설 <날개>를 읽으면서도 염세적인 태도와 몽환적인 서술에 빠져들었고, '나는 이상이 좋다' 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는 동안 점점 이상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쌓여갔는데, 그의 생활 태도가 꽤나 나태하고 여색에 빠져 있었으며, 훗날 김환기 화백의 아내가 되는 변동림(김향안)과의 결혼생활에서도 책임감이라고는 전혀 보여주지 않은 듯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당대에 영민한 재원으로서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 비슷한 것으로 일하며 일제의 식민사업에 간접적으로나마 도움을 주었다는 것과 동경을 그야말로 동경했다는 것도 그를 조금씩 좋아하지 않게 된 이유다.

작가의 작품 밖 삶을 보고 작품에 대한 감정을 갖는다는 것이 평론가에게 있어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일지 모르나, 나같은 일개 평범한 독자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나마 이상은 보통의 소설들과 다르게 마치 시를 쓰듯 추상적인 소설을 썼고, 그 자신이 현실과 괴리된 상태로서 소설 속의 허구를 만들어냈다고 하니, 그 자신의 삶과 소설을 연관지어 감상할 여지가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의 삶에 대한 여기 저기의 기록들을 들춰보고 접한 그의 소설들은, 삶의 배경을 배제하고서라도 시만큼 뛰어나 보이지 않는다. 당시에는 더 낯설었을 형식과 지금 보아도 어색한 일본식 표기나 외래어의 남발 등은 동시대의 다른 작가의 작품들과 비교할 때 더 훌륭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없다.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내놓았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존재 가치와 의의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 책에 수록된 그의 단편소설들은 한밤 중 술에 취해 쓴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니, 이게 바로 난해하고 비논리적인 서술을 설명해주는 것 같다. 몽롱한 정신 상태에서 쓴 몽롱한 소설이라니, 말이 되지 않나. 물론 그 덕에 꾸민 듯하지 않아 자연스러운 광기가 묻어나며, 반대로 이게 바로 그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일일 수도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했다니 왠지 못 미더운 것도 진심이다. 못 미더웠던 작가가 한 명 더 있었는데, 그렇지. 어둡고 고독한 내면, 삶에 공포를 느끼는 듯한 작품 속 주인공들, 그럼에도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환경, 기본적인 환경을 마련한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 여자들에게 생계를 맡기다시피한 무능력함, 어쩐지 외모까지도. 이상은 다자이 오사무와 겹쳐 보이는 구석이 많다. 고작 두 사람을 두고서 유형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음울한 작품을 탄생시키는 사람들은 닮은 구석이 있나 하는 생각도 언뜻 스친다. 이 책의 표지가 된 구본웅이 그린 친구 이상의 탁한 초상은 이상에 대한 인상을 더 굳게 만든다. 그나마 개성이라고 할 만한 것은 분명한 모더니스트였을 텐데, 요절해버린 것은 참 아쉽다. 그가 좀 더 생을 부여잡고 살며 장년을 넘어 노년까지 작품 활동을 해주었다면 더 성숙하고 뛰어난 작품들도 충분히 만나게 해주었을 텐데 말이다. 여전히 좋아하는 그의 시들은 더욱 더.

위로가될수있었나보다. 아내는혼곤히잠이들었다. 전등이딱들하다는듯이물끄러미내려다보고있다. 진종일을물한모금마시지않았다. 이십원때문에그들부부는먹어야산다는 철칙을ㅡ그장중한법률을 완전히 거역할수있었다. (81쪽, '지주회시')

나는 가장 게으른 동물처럼 게으른 것이 좋았다. 될 수만 있으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 버리고도 싶었다.

나에게는 인간 사회가 스스러웠다.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91쪽, '날개')

여기 더 앉았다가는 복어처럼 탁 터질 것 같다. (157쪽, '동해')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202쪽, '실화')

새로이 방문하여 오는 절망을 느끼면서도 아직 나는 최후까지 줄기차게 살 것을 맹세하는 것일세. 과거를 너무 지껄이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면 장래를 너무 지껄이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 것일세. (276쪽, '십이월 십이 일')